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기자의 시각] 자기 돈이면 이렇게 했겠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김은정 경제부 기자


"은행 빚 갚으러 간 날이었어요. 안전하고 이자도 주니 대출금 갚지 말고 6개월만 잠깐 투자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넉 달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고객님 현재 75% 손실 중인데요'라니…."

"우리보다 잘사는 독일이 망하기야 하겠느냐기에 덜컥 가입했죠. 근데 늦었어요. 은퇴 자금 대부분 날리게 생겼습니다."

"가입란에 서명한 할망구는 밥도 못 먹고 울기만 해요. 어떻게 10년을 알고 지낸 은행원이…. 자기 돈이면 이렇게 했겠어요?"

해외금리 연계형 파생금융상품 DLS(파생결합증권)에 투자한 4000여명이 불과 몇 달 만에 5000억원 넘는 돈을 날리게 생겼다. 독일 국채금리나 미국·영국 등의 시장금리가 50~60% 폭락하지 않으면 연 3~4%대 금리를 주기로 했는데, 설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세계 경기가 금융 위기 이후 최악이어서 안전 자산으로 알려진 선진국 국채를 사겠다고 전 세계 투자자들이 몰려든 결과다.

은행에서 최소 가입금 1억원 이상씩 사모(私募)펀드 형태로 팔았기 때문에 가입자 중 상당수는 자산가이겠지만, VIP 고객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만기 된 예금을 다시 예치하러 갔다가 '걸린' 사람, 은퇴 자금을 굴리다가 허망하게 날리게 된 사람도 있다. 특히 노인이 많다. "보이스피싱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은행에서 당했다"는 탄식도 나오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자격을 갖춘 은행원이 팔았는지, 원금 손실 가능성을 확실히 알렸는지 등을 따져볼 것이다. 그 결과 은행 잘못이 드러나면 투자자 손실의 상당액을 물어줘야 한다. 2013년 터진 동양그룹 기업어음(CP) 사태 이후 금융회사들은 밑줄까지 그어가며 "고객님, 원금 보장 안 되는 상품인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상담 내용을 녹음도 해왔다. 수수료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식의 약탈적 판매 관행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현장은 그다지 진일보한 게 없는 것일까.

해외에서 만든 복잡한 파생 상품을 많이 판다고 글로벌 금융회사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요즘 은행들은 이상한 쪽으로 경쟁하고 있다. 고객들이 올린 수익률은 은행원 실적에 고작 2~5%쯤 반영될 뿐 판매 실적, 지점 이익 기여도 같은 항목이 평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장사엔 상도(商道)가 있는데, 고객이 맡긴 돈으로 장사하는 금융인들이 거간꾼처럼 돼 버렸다. 결국 제 발등을 찍을 것"이라는 한 금융회사 CEO의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마침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덴마크 출신 3인조 작가들의 흥미로운 설치미술전이 열리고 있으니, 시간 되는 금융인들은 한번 가보시길 권한다. 금융 위기 때 사라진 은행들의 로고를 그린 '파산한 은행들(Bankrupt Banks)'이란 작품이 있다. 고객이 있어야 은행이 있고, 그래야 은행원 봉급도 나오는 것이다.

[김은정 경제부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