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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금품 뺏겨도, 부상당해도…미등록 체류자들 ‘냉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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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피해 구제 ‘통보의무 면제 제도’ 유명무실

스리랑카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 잔나씨(38)는 2017년 10월쯤 공장 관리자에게 25돈짜리 금목걸이를 빼앗겼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없는 살림에도 금목걸이를 차고 다닌다. 화를 막고 복을 부르는 부적으로 생각한다. 관리자는 1년이 지나도록 돌려주지 않았다. 잔나씨가 목걸이를 되찾은 건 지난 4월 대구 성서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한 뒤다.

금목걸이 뺏기고 1년 쉬쉬

사고 땐 병원 안 가고 잠적

제도 존재 자체 모르거나

되레 ‘강제출국 될라’ 불신

임금체불은 아예 대상 밖


잔나씨가 경찰 고소를 1년 가까이 망설인 건 강제출국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현행 출입국관리법령상 잔나씨처럼 범죄 피해자가 된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강제출국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경찰 등 공무원은 출입국관리법을 위반한 외국인을 발견하면 지방출입국 및 외국인 관서의 장에게 통보할 의무가 있지만 범죄 피해자 구조나 인권침해 구제와 관련된 사안에서는 예외다. ‘통보의무 면제 제도’다.

잔나씨는 성서공단노조와 상담하기 전까지 자신이 통보의무 면제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제도가 필요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정작 제도 홍보가 안된 것이다. 대상 범위도 협소하다. 이 제도가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용철 성서공단노조 상담소장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중 대다수가 피해를 당해도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오히려 신분상 불이익을 걱정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그는 “잔나씨도 통보의무 면제 조항을 알았다면 긴 시간의 고통을 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강원 속초시의 한 공사 현장에서는 사고를 당한 미등록 체류자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종적을 감췄다. 당시 공사용 엘리베이터가 15층에서 추락하면서 3명이 숨지고 3명이 다쳤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으로 추정되는 부상자 2명이 병원 이송 직후 치료를 받지 않은 채 종적을 감췄다. 법무부는 “신고를 하지 않고 종적을 감추다 보니 미등록 체류자의 수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설령 신고해도 통보의무가 면제되니 마찬가지로 통계엔 안 잡힌다”고 했다.

종적을 감춘 피해자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지난 7월 강원 삼척시 가곡면 풍곡리의 한 고갯길에서 발생한 승합차 전복사고로 태국 출신 미등록 이주민 3명이 다쳤다. 이들은 자신들 옆에 있던 김모씨(75·여)를 구조한 뒤 잠적했다. 삼척경찰서 관계자는 “범죄자라면 신병을 확보해 조사해야겠지만 피해자 아닌가. 강제출국을 위해 그분들을 조사해 출입국사무실에 알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경찰서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3명 중 1명이 나중에 모습을 드러낸 뒤 병원 치료를 받았다.

백선영 민주노총 미조직전략조직부장은 “통보의무 면제 제도가 미등록 체류자 사이에 잘 알려지지 않아 치료도 받지 않고 도망가는 것 같다”고 했다. 김용철 소장은 “정부와 경찰이 여러 나라 언어로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체불 피해는 통보의무 면제 대상이 아니다. 김 소장은 “지난해 이주노동자 336명이 우리 상담센터에 찾아왔는데, 90%가 체불임금 문제를 상담했다. 그 가운데 90%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며 “하지만 정작 임금체불 사건은 민사로 취급돼 통보의무 면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백 부장은 “임금체불 신고 때 근로감독관이 법무부에 신고자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알리는 사례가 있다. 이들이 일상적으로 정부기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황필규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는 “통보의무 면제로는 미등록 체류자를 충분히 보호할 수 없다. 통보의무가 없다 뿐이지, 통보해도 되기 때문”이라면서 “통보의무 자체를 손봐야 한다”고 밝혔다. 황 변호사는 “체류자격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법을 위반한 것에 불과하다. 권리 보장이나 피해 구제 등은 체류자격과 무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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