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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아침 햇발] 손 놓고 있는 강제징용 실태 조사 / 박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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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병수
논설위원


이번 한-일 갈등은 전례 없는 양상이다. 과거사를 둘러싸고 일본이 공세적인 건 처음이다. 과거사 갈등이 경제·무역갈등으로 확대된 것도 이전에 없던 일인데, 이젠 한술 더 떠 안보 분야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주변 환경이 의미심장한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진단에 기꺼이 ‘한 표’ 던지고 싶어진다.

한-일 갈등이 어디로 갈지는 아직 추측의 영역이다. 많은 이들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거부한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의 압류 국내 자산이 현금화되는 시기를 주목하고 있다. 이들 자산이 경매를 거쳐 징용 피해자의 위자료로 지급되면 일본 정부가 추가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정부도 맞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면서, 한-일 관계는 더 엄중한 시기를 맞게 될 개연성이 크다.

때늦은 얘기지만, 문제 해결 방법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한-일 간 상충하는 판단을 어떻게 절충하느냐에 있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우리 대법원은 “불법적인 강제징용 문제는 민사적·재정적 채권·채무관계를 정리한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정반대의 판결을 내놓고 있다. 한-일 간 입장 차이가 확연해서 당장 좁혀질 여지가 없는 게 현실이라면, 차라리 이를 두고 파열음을 낼 게 아니라 우선은 차이를 인정하는 건 어땠을까? 그래서 한국의 주장은 한국의 영토 안에서 효력을 갖고, 일본의 주장은 일본의 영토 안에서 효력을 갖도록 놔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한국 법원의 압류 대상은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신일철주금의 경우 현재 압류가 가능한 자산은 제철 부산물 재활용업체 ‘피엔알’(PNR)의 지분 30%(주식 234만주)라고 한다. 설립 자본금(390억원) 기준으로 130억원이며, 자산총액(2018년 12월 기준 707억원)을 기준으로 하면 235억원이다. 이 가운데 주식 8만1075주(약 4억원)가 압류된 상태다. 한 해 매출액 60조원이 넘는 신일철주금으로선 큰돈이 아니다. 미쓰비시는 가치 평가가 어려운 상표권과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이 압류돼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한-일 관계 악화를 볼모로 정면으로 반발할 만큼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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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물론 다른 방식으로 작동됐다. 거기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본 국내의 정치적 요인, 내부 논리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베 정부가 한-일 관계 악화를 무릅쓰고 일본 기업에 “배상하지 말라”고 지시하며 정면충돌을 선택한 것은, 대법원 판결이 1965년 한-일 협정 체제를 흔든다고 봤기 때문인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계속 사죄의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 수정주의자 아베 신조 총리에게, 65년 체제는 기존 과거사 해결 방식의 기반이었던 만큼 양보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큰 틀에서 보면 미-소 냉전 시기 65년 체제가 뒷받침했던 한-미-일 삼각 체제가 문재인 정부의 남북 화해·평화 정책에 의해 약화하는 것도 두고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 한-일 갈등은 장기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많다. 이는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간 근본적인 시각차의 충돌이며, 향후 남북 화해냐 대결이냐의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일본 정부도 그렇겠지만 한국 정부도 섣부른 봉합이나 타협이 쉽지 않다.

이미 벌어진 싸움이니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강제징용의 실태 조사가 여전히 미흡한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태 조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진행된 적이 있지만, 현재는 2015년 12월 특별법이 연장되지 않으면서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실태 연구의 ‘실탄’ 없이, 어떻게 징용 피해자를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고쳐 부르며 강제동원 문제를 희석하려는 일본과 맞설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징용 피해자는 고령이어서 갈수록 생생한 현장 경험을 전해 듣기 어려워지고 있다. 서두를 필요가 있다.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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