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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신비하고 몽환적인 음색 ‘천상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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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황우창의 어디서든 음악

⑫한과 그리움의 바람 소리, 아르메니아 두둑

아르메니아에서는 축제나 결혼식,그리고 장례식에까지 다양한 행사와 전통 의식에서 모두 이 두둑을 연주한다. 이렇다 보니 ‘천상의 소리’라는 별명 이외에도 두둑은 ‘아르메니아의 혼’, ‘희망의 소리’ 등 수많은 별명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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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힘은 위대하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 익숙하지 않지만 매력적인 리듬과 멜로디를 통해 낯선 곳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꿈꾸다 보면 사전 정보가 없든지 또는 여러 이유로 스멀스멀 두려움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비한 음악이 자아내는 호기심과 감동은 그런 두려움조차 상쇄시킨다. 아르메니아의 전통 악기, 두둑이 그랬다. 이 신비로운 소리를 처음 만난 지 이십여년이 거의 다 되어간다. 두둑 연주자 지반 가스파랸의 음반들을 꺼내 밤새도록 들어본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 두둑 소리에 홀린 나머지, 도저히 궁금해 못 참은 글쓴이는, 결국 해외 인터넷 악기 판매 사이트를 두드려 이 아르메니아 악기를 구했다. 아르메니아 프로 연주자들이 직접 쓰는 모델과 같단다. 제대로 교육 한번 받은 일 없으니 그럴싸한 소리가 날 리 없다. 하지만 이 오묘한 소리를 내는 두둑이라는 악기, 그리고 이 악기의 소리에 한과 그리움을 담아내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본다. 그게 벌써 십년이 훨씬 더 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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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는 분명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최우선 순위로 꼽히는 지역이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들의 본능을 가장 잘 자극하는 곳이기도 하다.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현실을 고려한다면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옛소련 이야기가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그 이상으로 놀라운 역사적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을 보면, 대홍수가 지난 뒤 최초로 발견된 물 위의 육지가 바로 아라라트산이라는 기록이 있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를 만나 떠돌다가 물이 빠지면서 도착했다고 하는 산인데, 아르메니아에는 이 산이 실제로 있다. 또한 기독교 문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 바로 ‘롱기누스의 창’이 아르메니아에 실제로 존재한다. 기독교 문화를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받아들인 나라이자, 이스라엘 지역 이외에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 지정학적 위치로 보면 아르메니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왼쪽으로는 터키, 오른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공화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라크,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렇다 보니 서구 유럽의 역사 속에서 아르메니아는 터키와 함께 동양의 문화가 건너올 때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덕분에 서구 유럽에서는 자신들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색다른 신비함을 간직한 나라,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나라, 실크로드 가운데 서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등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신비함을 소리로 상징하는 악기가 바로 전통 악기 두둑이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즐겨 쓰이는 두둑

유럽 문화권에서 두둑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천상의 소리’다. 클라리넷이나 오보에 등 클래식에서 사용되는 목관 악기와 비슷한 소리가 나지만, 클라리넷과 오보에가 좀 더 목가적이라면 두둑은 여기에 신비함과 약간의 몽환적인 분위기, 그리고 망향의 서글픈 감정이 담겨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독특한 음색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르메니아 음악에서 월드 뮤직의 신비한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축제나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에까지 다양한 행사와 전통 의식에서 모두 이 두둑을 연주한다. 이렇다 보니 ‘천상의 소리’라는 별명 이외에도 두둑은 ‘아르메니아의 혼’, ‘희망의 소리’ 등 수많은 별명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할리우드를 비롯해 영화계에서는 초기 기독교 전파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이 두둑 소리를 단골로 사용한다. 혼돈의 시대에서 뭔가 어렴풋이 정리가 된다든지, 초기 기독교 문화가 전파되던 시대를 표현하기에 두둑의 신비하고도 몽환적인 음색이 딱 어울린다고 서구 사람들도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나, 상업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커다란 성공을 한 <글래디에이터>에서 이 두둑 소리를 만날 수 있다. 심지어 기독교 문화나 아르메니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여기저기 시대를 살짝 마구잡이로 버무린 영화 <300>에서조차 이 두둑 소리로 고대의 신비로운 시대를 표현하기도 했다. 장쾌한 정경에 어울리는 소리는 왠지 두둑의 크기나 스케일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들지만, 정작 이 악기의 크기는 기껏해야 30㎝ 정도, 그리고 연주 가능한 스케일은 단 1옥타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스케일과는 상관없이 두둑의 음색은 듣는 이의 영혼을 쓰다듬어주는 듯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며, 우리의 정서와도 잘 맞닿아 있다.

두둑의 상징 지반 가스파랸

이 아르메니아 전통 악기 두둑을 세계적으로 알린 사람이 바로 지반 가스파랸이다. 1928년생이니 아흔을 넘긴 고령이지만 지금도 최소한의 활동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여섯살 때부터 두둑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스무살 때부터 본격적인 프로 연주자로 활동했다. 아르메니아 현지에서는 국보급 예술가로 통하는데, 지반 가스파랸이라는 이름 자체가 바로 두둑을 상징하며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을 상징한다고 봐도 좋다. 옛소련의 영향 탓으로 아르메니아 사람들 역시 보드카를 즐겨 마시는데, 가장 각광받는 보드카 브랜드 중 하나가 바로 ‘지반 가스파랸 보드카’일 정도다. 1980년대 중반 월드 뮤직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 지반 가스파랸은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지만, 해외 유수의 연주자들과 가수들, 그리고 팝스타들이 자신들의 음악적 역량을 넓히기 위해 너도나도 지반 가스파랸을 찾아 아르메니아를 방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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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지반 가스파랸이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대외 활동을 거의 중단하는 바람에 두둑 연주에 관한 관심은 프랑스 태생 아르메니아계 연주자 레본 미나시안에게 돌아가는 경향이 짙다. 앞서 언급한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삽입된 두둑 연주라든지, 해외에서 레퍼런스로 삼는 두둑 소리는 대부분 이 레본 미나시안의 것이라고 보면 된다. 1958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레본 미나시안은, 197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찾아 부모의 고향 아르메니아를 찾아가 두둑을 포함해 아르메니아 전통 음악을 수학했다. 이때 두둑의 전설 지반 가스파랸을 만나 사사하는데, 이후 두둑의 연주 전통은 레본 미나시안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월드 뮤직이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두둑 연주자의 이름이 등장할 때 레본 미나시안의 이름이 지반 가스파랸과 나란히 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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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레본 미나시안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에는 아르망 아마르라는 프랑스 영화음악가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예술영화나 다큐멘터리, 특히 항공사진 전문 작가 얀 아르튀스베르트랑이나 영화감독 에리크 발리, 라시드 부샤렙 등 프랑스와 유럽 등지에서 화제가 되는 작품들의 사운드트랙을 아르망 아마르가 도맡아 했다. 이때 특이하고 신비한 분위기에서 여지없이 레본 미나시안의 두둑 연주가 등장한다. <하늘에서 본 지구>나 <얀의 홈>, <휴먼>, <영광의 나날> 등에서 등장하는 두둑 소리는, 단순히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움을 담는다는 사실을 넘어 인류가 고민하는 당면 과제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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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반 가스파랸과 레본 미나시안의 두둑 연주를 마음에 담고 아르메니아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음반이면 더 좋고, 유튜브든 다운로드 파일이든 두둑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다. 터키나 아제르바이잔 등 아르메니아 주변 국가들과 얽힌 어두운 역사는 잠시 잊어도 된다. 있는 그대로, 아르메니아의 아름다운 전경을 살펴보자. 직접 여행을 떠나도 좋고,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서적이나 인터넷을 통해도 좋다. 수도 예레반의 이국적인 정취도 좋고, 게가르드 수도원처럼 자연과 종교가 어우러지는 절경도 좋다. 제주도 중문이나 서귀포에서 보던 주상절리의 모습은 가르니계곡에서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다. 막연히 신비하기만 했던 두둑의 소리 속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담아내는 한과 그리움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이제 아르메니아로 떠나는 일만 남았다. 보통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를 포함해 코카서스 3국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아르메니아를 만날 수 있는데,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별명 속에서도 두둑의 짙은 향취를 담은 아르메니아라면, 그 여행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두둑 소리는 그만큼 매력적이다.

음악평론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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