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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장 "성락원 가치 원점에서 재검토"…명승 22곳 전수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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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 영벽지 바위에 새겨진 글씨. 고드름을 뜻하는 ‘장빙가(檣氷家)’라는 의견과 함께 ‘장외가(檣外家·담장밖 집)’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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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 가치,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전국 22곳(성락원 포함)의 정원유적(명승)도 전수조사하겠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23일 최근 논란을 빚은 성락원(명승 제35호)의 가치를 원점에서 재검토해 국가지정문화재 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정재숙 청장은 이날 김영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한 성락원 ‘명승지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성락원 지정 과정에서 나타난 과오를 반성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 청장은 “명승 113곳 중에서 정원(누·대·정 등 포함) 유적 22곳에 대해 전수조사를 벌이겠다”고 덧붙였다. 해당 정원은 선몽대(명승 제19호·퇴계 이황의 종손자가 1563년 건립)와 전남 순천 초연정(명승 제25호·1788년 대광사 승려가 창건), 전남 완도 보길도 윤선도 원림(명승 제34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제36호) 등이다.

■고종의 호위 배관이 조성한 정원

이중 문제가 된 성락원(서울 성북구)은 조선조 철종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자 의친왕의 별궁이라는 이유로 1992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에서 2008년 명승으로 명칭변경)로 지정됐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1983년과 1992년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문화재로 지정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논란을 빚었다. 그 과정에서 김영주 의원이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은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성락원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모신 호위내관 황윤명(1848~?)이 조성한 별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자인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성락원이 고종을 모신 내관인 황윤명이 1884년 이전에 조성한 정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황윤명 문집인 <춘파유고>에 수록된 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가 성락원 영벽지 바위 글씨와 일치하고,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혜화문을 나가 황윤명 집을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토론자들은 성락원 고증 부실과 지정 과정상 나타난 문제를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그러나 성락원이 명승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엇갈린 견해를 나타냈다. 명승 지정 기준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 저명한 경관의 전망 지점,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있는 경관, 저명한 건물 또는 정원·중요한 전설지 등이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황윤명은 내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문인 내시’였다”고 평가했다. 서법에도 이름을 날린 황윤명의 글씨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의 <근묵>에 실려있고, 역대서화가의 평전인 <근역사화징>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대쪽선비’인 황현(1855~1920)도 <매천야록>에서 “황윤명은 시와 서화에 능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특히 황윤명이 남긴 글은 양손(養孫)인 안태영이 <춘파유고>라는 이름으로 1983년 간행했는데, 내시출신으로 문집을 남긴 유일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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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한국의 3대 정원이라며 공개되었던 성락원. 그러나 정원 조성자를 두고 논란을 빚었고, 최근에는 고종의 호위내관이었던 황윤명의 정원이라는 사료가 확인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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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속 바위글씨, ‘장빙가인가 장외가인가, 추사체인가 아닌가’

박 소장은 “‘성락원 내’ 바위글씨 6기는 동시대가 아니라 정원 조성 이전부터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새겨진 글씨”라는 견해를 밝혔다. 박 소장은 “이중 영벽지 일원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또 다른 호인 ‘완당’과 함께 새겨진 ‘장빙가(檣氷家)’ 바위글씨는 전형적인 추사체는 아니지만 “유배(1840년) 이전의 추사글씨일 가능성은 있다”면서 최종 판단을 유보했다. 손환일 대전대 서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 글씨는 추사체와는 거리가 멀다”고 부정하면서 글씨도 ‘장빙가’가 아니라 ‘장외가(檣外家)’라고 주장했다. 반면 지난 6월 1차 자문위원회에 참석한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직획 위주의 고예(전한 시기의 서체·전서보다 간략하고 해서에 가까운 한자서체)스타일 글자구조로 바위에 새겨진 추사체”라고 보았다.

토론에 나선 정기호 전 성균관대 조경학과 교수(전 문화재위원)는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매우 특이하다”며 “성락원은 전형적 문인 정원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토론회 좌장을 맡은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특수계층인 내관이 경영한 정원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문화재가치가 충분하다”며 “또한 영벽지를 비롯한 바위글씨들은 18세기 이후 근대까지 거의 200년에 걸친 자연스러운 정원 조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서있는 ‘북묘비’에 “‘갑신년 겨울에 역란(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등과 더불어 관우장군 사당(북묘)으로 피신했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명성황후가 황윤명 별서로 피신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원호 학예사는 “고종이 친히 지었다는 ‘북묘비’에 등장한 내용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나(고종)는 전궁의 상하와 함께 관왕의 사묘(관묘)로 피신했다’는 모호한 내용”이라고 반박했다. 문헌사 전공인 안대회 교수는 “변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 일가가 한꺼번에 같은 곳으로 피신하는 경우는 없다”면서 “임금과 세자·대비·왕비 등의 피란처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황평우 소장은 “아무리봐도 성락원의 명승 자격은 취소해야 하지만 그동안의 ‘가꿈’을 인정하고, 막대한 시민세금이 투입된 점을 감안해서 ‘서울시기념물’ 정도가 타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이 박사(상명대)는 “일부 학자가 명승 지정과 관련 용역을 독점했다”면서 “이번 성락원 명승지정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규명해서 명승 지정, 나아가 문화재 지정에 대한 전반적인 제도와 시스템 개선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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