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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기자가만난세상] ‘반성 없는’ 반성문 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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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지난번에 제출한 반성문을 보면 뜬구름 잡는 얘기들이 있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지난 12일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첫 재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 506호 법정, 재판장은 본격적인 심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반성문 얘기를 꺼냈다. 이날 법정에 머리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나온 피고인 조씨의 황토색 수의 상의 주머니에는 반성문으로 보이는 종이가 접힌 채로 꽂혀 있었다. 귀가하는 여성을 뒤따라가 성폭행하려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씨는 지난달 9일, 11일, 19일, 24일, 31일에 이어 지난 7일까지 첫 재판이 열리기 전 총 6차례 반성문을 제출했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제출한 셈이다.

세계일보

유지혜 사회부 기자


조씨 같은 피고인들이 제출하는 반성문은 진정한 반성이 아닌 형량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성해서 반성문을 쓰는 게 아니니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씨는 사과문에 자신이 피해자 거주지 근처였던 집에서 나와 부모가 사는 지방으로 이사했다, 이유를 막론하고 자신의 행동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게 돼 죽을죄를 지었다, 다시는 찾아가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장은 “피고인이 뭔가 하고 싶은 얘기는 있을 테니 지금까지 제출한 반성문을 다시 한번 보고 이 사건에 관해 구체적으로 뭔가 써서 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1심에서는 반성문을 써내는 것이 사치라더니 하루가 멀다고 반성문을 써내고….” 지난 6월 ‘등촌동 전처 살인사건’ 항소심 판결 이후 만난 고인의 딸은 이렇게 말하며 아버지인 피고인의 거짓 반성에 분노했다. 유족의 말처럼 피고인 김씨는 변론 과정에서 1심 재판부가 “왜 반성문은 제출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무거운 처벌을 받기를 바라는데 반성문을 통해 선처를 바란다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1심 재판부는 전 부인을 스토킹하고 무참히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하면서 “피고인이 변론 종결 이후 제출한 반성문을 통해 뒤늦게나마 고인과 유족들에게 사죄의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김씨는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고, 항소심 과정에서 약 3달 동안 반성문을 12차례 제출했다.

과연 반성문으로 이들이 진짜 반성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까. 판사가 형량을 결정할 때 참조하는 양형 기준을 심의하는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에는 거의 모든 범죄의 감경요소로 ‘진지한 반성’이 들어가 있다. 한편 ‘반성 없음’은 가중요소에 포함된다. 피고인의 반성 여부가 실제로 형량에 영향을 줄 수 있단 얘기다. 당장 포털사이트에 ‘반성문 대필’을 검색하면 무수히 많은 대필 업체들이 나오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피고인들이 제출하겠다는 반성문을 막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의 재판장처럼 반성 없는 반성문에는 따끔한 지적이 필요하다. 조씨는 첫 재판 이후에도 지난 14일, 21일 추가로 반성문을 제출했다. 재판장의 충고를 듣고 난 조씨의 반성문에는 이제 ‘뜬구름 잡는’ 얘기가 사라졌을지 궁금해진다.

유지혜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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