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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이수연 PD의 방송 이야기] 촬영 중이니 비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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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얼마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모 드라마 촬영팀이 병원 장애인 주차 구역에 짐차를 세우고 되레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촬영에 방해되니 돌아가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몸이 아픈 가족과 병원을 찾았던 제보자는 어이없는 제작진 행태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은 촬영 명소에서 종종 벌어진다. 과거 여의도 방송국으로 출근하던 때였다. 평소와 달리 길이 꽉 막혀서 '앞쪽에 사고라도 났나?' 궁금하던 차에 어처구니없는 현장을 목격했다. 한 드라마 제작진이 연인의 벚꽃길 데이트 장면을 촬영하며 왕복 4차로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경광봉까지 들고 어찌나 당당히 길을 막던지, 시민들은 항의는커녕 보내주는 것만도 고맙다는 듯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어디 이뿐이랴. 방송국 주변을 생각 없이 걷다가 연기자 옆을 무심코 지나게 되면 "촬영하는 거 안 보이냐"는 타박을 듣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내 돈 내고 밥 먹는데도 촬영이 시작되면 조용히 하라거나, 카메라 앵글에 잡히니 자리를 옮기라거나 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 그때마다 '그래, 나도 방송 일 하면서 이해해야지' 하며 요구를 들어주지만, 한편으론 '나도 촬영 나가서 저러나?' 반추해 보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 제작진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도 있다. 변명을 대신 조금 해 보자면, 일단 제작 시간이 부족하다. 일명 '쪽대본'에 의지해 거의 생방송에 버금가는 제작을 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빨리 촬영을 끝내고 싶은 욕심에 무례를 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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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외국처럼 그 드라마만을 위한 세트를 짓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건물이나 도로에서 몇 시간만 허가를 받아 촬영하다 보니 약속된 시간 안에 일을 마치려면 현장 통제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요즘은 제작진을 A팀, B팀으로 나눠 촬영하거나, 아예 사전 제작으로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면서 무리수를 줄인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불편을 감수해 가며 촬영에 협조해주는 시민에게 충분히 양해를 구하고, 넘치도록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건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기꺼이 양보해 주는 것은 제작진의 윽박 때문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만들라는 선의(善意)의 배려이기 때문이다.



[이수연 TV조선 시사제작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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