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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남성의 은밀한 기대 위한 ‘가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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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19. 앵그르, ‘그랑 오달리스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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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엔 금남의 장소인 ‘하렘’이 있다. 술탄은 하렘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여성을 향해 손수건을 던져서 잠자리 상대를 결정했으며, 선택된 여성은 술탄의 침대로 기어서 들어간다.”

1604년에서 1607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머물며 베네치아 특사로 일했던 오타비아노 본(1552~1623)은 이스탄불에서의 경험을 글로 꼼꼼히 남겼다. 그는 특히 술탄(황제)이 잠자리 상대 여성을 간택하는 방법을 이렇게 묘사했다. 본의 글은 서구 남성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고, 오랜 기간 숱하게 인용되었다.

그 결과 하렘은 술탄의 성노예들이 우글거리는 환락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서구 남성들의 머릿속 하렘은 왕과 귀족 남성을 위해 여성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대기하는 공간이었다. 이 자극적인 소재를 예술계에서 외면할 리 없을 터. 많은 화가가 하렘 여인의 유혹적 자태를 앞다퉈 그렸다. <그랑 오달리스크>를 그린 프랑스 화가 앵그르(1780~1867)도 그중 한명이다. ‘오달리스크’는 후궁의 시중을 드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 하녀 ‘오달리크’를 프랑스어식으로 읽은 말이다. 하지만 동방에 환상을 품고 있던 프랑스 남성들은 오달리스크를 하렘의 여인이라고 생각했고, 앵그르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오달리스크를 퇴폐적이며 관능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그런 목적을 위해 신체 왜곡도 불사했다. 꼼꼼히 보면 그림 속 여성의 몸은 이상하다. 허리가 너무 길어 척추뼈가 일반인보다 세마디는 더 있어 보이고, 엉덩이는 비정상적으로 크며, 왼쪽 다리는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한 위치에 있다. 정확한 소묘를 중시했던 ‘대가’ 앵그르가 설마 해부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 그는 아름다움을 위해 과학을 자진 포기했다. 캔버스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동방 여인의 나체를 훑어볼 관객을 위해, 몸을 일부러 길게 늘인 것이다.

그림에는 인체 왜곡보다 더 심각한 왜곡이 있었으니, 바로 하렘과 오달리스크의 실체다. 하렘은 여성만이 머무는 규방, 즉 안채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하렘에는 가장의 부인과 첩뿐 아니라 아이들, 홀어머니, 비혼이거나 이혼한 누이, 시중 드는 하녀가 살았다. 그들은 하렘에서 아이를 돌보고, 바느질하거나 수를 놓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요컨대 하렘은 그저 여성 전용 생활공간이었다. 그러므로 본이 묘사한 하렘은 상상을 가미한 소설에 가까웠다. 앵그르 역시 하렘은커녕 동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하렘의 본모습을 증언한 사례를 보면 앵그르의 그림 속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하렘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 여성 가운데 한명인 영국인 소피아 레인 풀(1804~1891)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하렘이 부도덕하다고 보는 유럽인의 선입견이 오해라고 생각한다. 동방의 하렘 속 젊은 여성들에게 부과된 훈련은 수녀원과 비교될 수 있을 뿐이다.” 하렘을 일상 공간으로 묘사한 그림을 그린 뒤 비판받은 화가도 있었다. 프랑스 여성 화가 앙리에트 브라운(1829~1901)은 하렘을 직접 방문한 뒤 자신이 본 대로 그렸지만 이내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 표면적 이유는 여성인 브라운이 가정적이고 개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둬 동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남성의 은밀한 기대에 어긋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하렘의 진짜 모습은 상관없었던 게 아닐까. 앵그르가 아찔한 아름다움을 위해 가짜 몸을 그린 것처럼 말이다.



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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