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디지털금융 실험 중]
홍콩 센트럴의 은행가 모습. 뒷편의 건물은 중국은행(BOC). 한애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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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금융허브, 홍콩이 디지털 전환을 위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올 3~5월 석 달 새 무려 8개의 인터넷전문은행을 무더기로 인가했다. 고작 750만 인구에 8개 인터넷은행이라니, 세상 어디에도 없던 디지털금융 실험이다. 텐센트·알리바바·샤오미 등 대륙의 IT(정보기술) 공룡들이 여기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공항점거 시위가 평화적으로 시작됐던 8월 초, 그 현장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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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하기 전부터 메기효과 톡톡
“홍콩은 계좌 잔고가 1000달러(약 15만원) 이하이면 계좌 유지 수수료를 월 100달러(약 1만5000원)씩 내야 했거든요. 그런데 ‘버추얼뱅크(virtual bank)’ 8곳이 인가를 받자마자 HSBC를 비롯한 대형은행이 이 수수료를 없앴어요. 소비자 이익이 그만큼 높아진 거죠.”
홍콩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는 조나단 리는 출범을 앞둔 인터넷전문은행(버추얼뱅크)이 홍콩에서 큰 관심을 끄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1987년생인 나는 아직 씨티은행 고객이지만 홍콩의 1999년생은 처음부터 버추얼뱅크로 갈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홍콩금융관리국(HKMA)이 ‘버추얼뱅크’로 이름 붙인 인터넷전문은행은 이르면 올 연말에야 영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홍콩의 금융시장은 술렁이고 있었다. 2001년 도입된 ‘최소 잔고 수수료’가 18년 만에 사라진 것이 홍콩 은행권에 몰아칠 디지털 혁신의 힘을 보여준다.
홍콩 HSBC 본사 앞에 있는 사자상. 홍콩 소매금융 시장의 최강자 HSBC도 인터넷은행 출범 예고에 콧대를 꺾고 최소 잔고 수수료를 폐지했다. 한애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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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포용, 은행 문턱을 더 낮춰라
“홍콩이 잘하는 게 서로 경쟁시키는 겁니다. HKMA은 ‘혁신을 위해 홍콩이 좀 더 경쟁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홍콩핀테크협회의 브라이언 W 탕 레그테크위원회 의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인가받은 은행만 150곳이 넘고, 대로변 건물마다 은행 지점이 빽빽이 들어선 홍콩인데 아직도 경쟁이 더 필요하다니. 그 배경엔 은행 서비스의 양극화가 있다. 금융 컨설팅업체 PWC의 아키리코 카타야마 디렉터는 “2년 전부터 HKMA 주요 이슈는 은행 접근이 어려운 소외계층을 위한 금융포용”이라며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중소기업의 은행 문턱을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금융은 금융선진국 홍콩의 취약점이다. 예컨대 홍콩에서는 중소기업이 법인명의 계좌를 열려면 최소 6주에서 최대 6년까지 시간이 걸린다. 더 많은 기업이 더 빨리 은행 계좌를 만들게 하는 것. 그 숙제를 해결할 열쇠가 바로 인터넷은행이다.
HSBC 같은 대형은행은 부자를 위한 자산관리에 집중한다. 중국 위안화 가치 하락을 우려한 중국 부자들이 홍콩 은행으로 돈을 싸 들고 몰려들다 보니 소액의 개인 고객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홍콩의 살인적인 임대료도 기존 은행이 푼돈 영업을 외면하게 만드는 이유다. 인터넷은행은 임대료가 아예 필요 없기 때문에 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HKMA 판단이다.
홍콩 금융가의 전경. 홍콩은 인가 받은 은행만 150곳 넘게 있는 '오버뱅킹' 사회다.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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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테크핀 공룡들의 글로벌화 야심
이번에 HKMA의 인가를 받은 8개 인터넷은행의 최대주주는 출신 성분이 다양하다. 대형은행(SC, BOC), 보험회사(핑안), 홍콩기반 핀테크 유니콘 기업(위랩), 중국 초대형 정보기술(IT)기업(텐센트·알리바바·샤오미)이 골고루 포진해있다. 100여 곳에 달하는 초기 인가신청 컨소시엄 중 홍콩 당국이 선별해 고른 기업들이다. 사업 영역은 다양하지만 자본이 탄탄한 큰 기업이란 공통점이 있다.
1대 주주가 아닌 주요 주주사 중엔 전자상거래업체(JD디지털), 여행사(씨트립), 통신사(HKT)가 눈에 띈다. JD디지털은 중국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징동닷컴이 대주주인 핀테크 기업, 씨트립은 3억명 넘는 회원을 보유한 중국판 익스피디아다.
인터넷은행 주주 구성에 있어 산업자본에 대한 지분 제한은 없다. 레이몬드 창 홍콩중문대 교수는 “홍콩 은행 시스템엔 주주와 관련한 어떤 지분 제한 규제도 없다”며 “홍콩 금융당국은 (지분과 관련해) 자유를 주되 금융시스템을 해치지 않도록 감독을 철저히 한다”고 말했다.
인가받은 인터넷은행 8곳 중 3곳은 최대주주가 각각 텐센트·알리바바(앤트파이낸셜)·샤오미다. 이미 중국 본토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IT공룡이다. 각각 위뱅크·마이뱅크·XW뱅크라는 인터넷은행을 중국 본토에서 운영하고 있다. 13억 인구의 대륙을 주름잡던 대기업이 겨우 인구 750만의 홍콩 은행 시장에 눈독을 들인다니 특이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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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홍콩 핀테크 전문매체 디그핀의 제임 디비아시오 창업자는 “이들 기업은 중국의 핀테크가 중국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얼마나 통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려는 것”이라며 “홍콩에서는 서구 은행과 같은 시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해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홍콩이란 테스트베드를 발판으로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이다.
홍콩 입장에서도 중국 IT 기술이 긴히 필요하다. 금융서비스는 홍콩이 앞서지만 IT 기술 면에서는 중국이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는 알리페이, 위챗페이로 ‘현금 없는 사회’를 구현한 지 오래지만, 홍콩에선 여전히 한국의 ‘티머니’와 비슷한 충전식 선불카드 ‘옥토퍼스’가 대표 결제수단일 정도다. 브라이언 W 탕 의장은 “상하이는 이미 캐시리스(현금이 없는) 사회인데 홍콩은 여전히 현금 기반”이라며 “홍콩 금융당국은 좀 더 디지털로 가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홍콩의 공격적인 인터넷은행 전략은 다른 아시아 국가를 자극하고 있다. 홍콩이 인터넷은행을 무더기 인가하자마자 싱가포르는 5곳, 대만은 3곳의 인터넷은행을 인가하거나 인가를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아시아 지역 내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인 가운데, 한국은 오는 10월 제3 인터넷은행 예비인가 신청을 앞두고 있다.
홍콩=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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