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값 주고 산다고요? 오히려 비싼 값 부를 능력이 안돼서 문제입니다. 핵심 도시 중심 입지의 알짜 부동산이면 목표수익률 낮춰 잡고 가격 높게 부르는 유럽 연기금 펀드들에게 상대가 안 돼요. 한국투자자들은 자꾸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최근 만난 한 부동산금융업계 임원은 전세계 상업용 오피스 시장 내 국내 투자자들이 마주한 상황을 묻자 이렇게 진단했다. 글로벌 주요 도시 부동산 자산을 놓고 국내 증권사들끼리 입찰경쟁을 벌이는 것을 보며, 주요 도시 부동산 가격을 한국 투자자들이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던 찰나였다.
이들의 ‘쩐주’인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와 ‘대체투자’에 방점을 찍고 포트폴리오 조정에 나서고 있으니, 과도하게 열을 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나름의 결론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못 불러서 문제”라는 예상 외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국내 증권사들끼리 경쟁을 벌이며 가격을 높이는 광경은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중심이 아닌 외곽,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 미국·유럽이 아닌 동남아 등 신흥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중심부서 벗어나면 마주치는 경쟁자들도 제한적이다.
하지만 좁은 국내 투자업계 내에선 ‘누가 어디서 무슨 건물을 보고 있다더라’ 소문이 날 것이고, 이어 국내 투자자들끼리 치고박는 장면이 펼쳐진다. 알짜 자산에 집중해 그 자산을 비싼 값으로 인수해 가는 유럽투자자들은 무엇이 다를까. 주요 유럽 연기금들이 대체투자 자산에 대한 목표수익률을 일제히 낮춰잡고 있다고 한다.
각국 국민들의 노후자산을 책임지는 연기금이 일부러 목표 수익률을 낮춰 잡다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배경엔 ‘저성장·저물가·저금리’를 앞으로의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고수익을 목표로 숨은 보석을 찾아내봤자 과거와 같은 재미를 보기 힘드니, 차라리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안전한 자산에 돈을 묶어두자는 계산일 것이다.
그 결과 유럽 연기금의 돈을 받아 운용하거나 이들에게 자산을 재매각할 증권·운용사들이 알짜 상업용 오피스를 매입하면서 고려하는 자본환원율(자산가치 대비 임대료 비율)은 최근 3% 후반까지 떨어졌다. 5%는 맞춰야 들이밀어볼 수 있는 국내 투자자들과는 올라가 있는 ‘링’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국민연금이 고민해 봐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비싼 값을 부를 수 있게 된 해외 투자자들에게 알짜자산 매입 기회를 뺏기게 될 상황에서, 변방의 ‘숨겨진 보석’을 찾아낼 만한 역량이 있는가를 자문해봐야 한다. 지난 5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부동산투자실 및 인프라투자실의 운용역 수는 기획재정부가 승인한 정원(각각 20명, 18명) 대비 4명, 1명이 부족한 실정이다. 올해 채용이 마무리 될 내달 초쯤엔 이 공백의 일부는 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투자 영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운용역의 역량은 ‘하락과 상승 사이클 모두를 경험해 본 것’이라고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경험한 부동산자산 운용역은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우리도 목표수익률을 낮춰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도 필요하다. 혼자서만 높은 수익을 추구하고 실현해낼 만한 역량과 네트워크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 하루빨리 ‘뉴노멀 포트폴리오’라는 링으로 갈아타야 한다.
특히 저성장에 대비한 목표수익률 조정은 비단 부동산 자산에만 그치지 않고 있다. 캘퍼스(CalPERS·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 등 미국 주요 연기금들도 사모펀드나 헤지펀드에 돈을 맡길 때 목표수익률을 낮춰 잡고 있다고 한다. 목표수익률을 낮춰잡게 되면 ‘기금고갈’과 관련해 내놓을 답도 달라지게 된다. 기금고갈 시기가 당겨지게 되면, 현 정부가 주저하고 있는 연금개혁에 대해서도 한층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전세계 투자자들이 긴 겨울에 대비해 설피(雪皮)로 갈아신고 있다. 걸음 속도는 더뎌지겠지만,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계절처럼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 해진 운동화를 신고 저 혼자서만 눈밭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튼튼한 설피를 마련해두긴 했는지 자문할 때다. hum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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