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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갑질 피해당하면서 갑질… 미워하며 닮는 ‘을의 굴레’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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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대부분이 매일 보는 동료·손님 / 마트 등 유통업 종사자 61% “피해 경험” / “한국 갑질문화 심각한 수준” 96% 답변 / 초면에도 나이 밝혀 서열 정하는 전통 / 민주적 의사소통 막는 ‘병폐’ 심화시켜 / 많이 당할수록 더 약자에 되갚는 경향

세계일보

#1. 경기 의정부의 한 편의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심모(24)씨는 “손님들의 갑(甲)질은 일상”이라고 말했다. 돈을 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네가 알바인데 서비스가 이게 뭐냐’면서 트집을 잡는 경우도 잦다. 심지어는 표정을 갖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심씨는 “젊은 손님이 ‘왜 이렇게 표정이 좋지 않냐’면서 시비를 걸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며 “(고객들이) 알바생에게는 갑질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2. 지난 6월2일 새벽 부산 연제경찰서에 한 패스트푸드 음식점에서 손님이 종업원을 때린다는 내용의 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출동한 경찰은 종업원을 수차례 밀치고, 뺨을 7~8차례 때리는 등의 혐의로 30대 여성 A씨를 현행범 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술에 취한 A씨는 “내가 2층에 있는데 왜 부르지 않았냐”면서 종업원을 폭행했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도 “기분이 나빠서 때렸다”고 진술했다.

갑질이 일상화된 시대다. 갑질을 직접 당했거나 주변에서 목격한 사례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4일 고려대 불평등과 민주주의연구센터에 따르면 이 센터가 한국리서치와 함께 지난해 8월 성인남녀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갑질 및 갑을관계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중 96%가 한국의 갑질 문화에 대해 매우 심각하다거나, 대체로 심각하다고 답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갑질을 당한 적이 없다’고 답한 응답자는 10명 중 1명(10%)에 불과할 정도로 갑질이 일상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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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과 직원, 직장 내 선후배 관계 등 빈약한 연결 고리만으로라도 일종의 ‘서열 관계’가 형성되면 누구든 갑질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갑질에 자주 노출될 경우, 자존감 하락을 경험할 뿐 아니라 이를 자신보다 약한 을(乙)에게 되갚아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손님은 왕, 이 정도는 해줘야지”… ‘고객 갑질’

일상 속 갑질과 가장 쉽게 마주하는 이들은 바로 고객 상담원 등 대인서비스업 종사자들이다. 특히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고객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감정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갑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계산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모(53·여)씨는 “잔심부름과 욕설은 기본이고, 매일 찾아와 일을 못 하도록 괴롭히기도 한다”며 “(고객의) 계속된 갑질을 참지 못하고 퇴사하는 동료도 있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발표한 ‘유통업 서비스 판매 종사자 건강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 3470명 중 고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61%에 달했다. 이들은 고객으로부터 폭언은 물론 폭행과 성희롱까지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부터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되고 직원(Worker·워커)과 손님(Customer·커스터머) 간의 균형(Balance)을 뜻하는 ‘워커밸’이란 신조어까지 나왔지만, 아직도 현장에선 고객의 갑질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한다. 대형 호텔에서 근무하는 김모(25·여)씨는 “(감정노동자보호법 시행 이후) 아직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면서 “(워커밸 문화가) 확산되길 바라지만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 아르바이트 근무자 13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워커밸이 실제 현장에 정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10명 중 8명(79.8%)에 달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 이성종 집행위원장은 “(법 시행 이후)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경우는 없지만, (감정노동자들이) 일상적인 갑질은 겪고 있다”며 “조만간 고객의 과도한 요구나 폭언, 폭행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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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입사했으니 이런 지시쯤”… ‘상사 갑질’

회사도 일상적으로 갑질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매일 마주해야만 하는 직속상사의 갑질은 을들의 건강까지도 위협한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 6월 직장인 800명을 상대로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는지 물어본 결과, 10명 중 6명 이상(64.3%)이 ‘당한 적 있다’고 답했다. 특히 갑질을 일삼은 상대방으로 ‘직속상사, 사수, 팀장’을 꼽은 응답자가 51%를 차지했다. 이는 임원급(11.9%)과 대표(11.8%)를 합친 것의 두 배가 넘는다.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A(26)씨는 “입사연도도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상사가 자꾸 업무를 넘길 뿐 아니라 폭언도 일삼는다”며 “(상사를) 매일 만나야 한다는 게 직장 생활 중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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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분노·불안 등 감정적 고통뿐 아니라 수면 장애 등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피해로 인한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1657명 중 67.3%가 분노·불안 등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일에 대한 의욕 감퇴(62.8%)뿐 아니라 불면증(28.5%), 통·입원 또는 약물 복용(11%)까지 하는 등 갑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의 최혜인 노무사는 “상담 사례 중에는 갑질로 인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실신한 경우도 있었다”며 “(직장 갑질 피해자들은) 우울증과 적응장애 등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잖아”… ‘나이 갑질’

고객과 직원, 상사와 후배 같은 일종의 ‘상하관계’가 없더라도, 일상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갑질이 벌어지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사이일 경우 나이를 가장 먼저 묻고, 호칭 정리와 반말 사용으로 자연스럽게 상하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 이모(26)씨는 “같은 아르바이트생끼리도 나이로 근무 시간을 배정하거나, 쓰레기 분리수거 담당을 정한다”며 “나이 어린 사람이 힘든 일을 맡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갑질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어, 이러한 갑질에 반기를 들기란 사실상 힘들다. 송재룡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어려서부터 (나이로 인한) 위계적 구조를 경험한 학생들은 동등한 위치라도 선배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나이 서열 문화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막는 등 병폐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일상 갑질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로… “민주적 규범 훼손하기도”

일상 속 갑질을 반복해서 경험할 경우 언제, 어디서든 갑질을 마주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릴 수 있다. 손상된 자존감을 보상받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또 다른 을에게 갑질을 하는 ‘갑질의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와 한국리서치가 ‘갑질 및 갑을관계에 대한 인식조사’를 토대로 갑질 피해 경험이 또 다른 갑질 행위를 유발하는지를 분석한 결과, 피해 경험이 많을수록 갑질을 행사한 경험 또한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악순환이 이어지면 사회 질서의 근간인 민주적 규범이 약화할 뿐 아니라 구성원 간 불신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연구를 진행한 조계원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갑질 피해 경험이 많을수록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고 응답한 경우가 많았다”며 “(갑질 피해자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절차나 제도적 장치를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나라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회 불신’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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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의 횡포 막을 법·제도 부족… 사회 전반 심각성 일깨워야”

우리 사회에서 갑질이 일상화된 원인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서열문화와 이를 바로잡아줄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갑질 문화를 근절하려면 그 심각성을 정부 차원에서 인지하고 법·제도 보완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재룡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4일 “갑질 문화는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경향성에서 시작된다”면서 “오래전부터 이어진 유교의 차등적 윤리 규범에 기초한 위계적인 문화가 이 문제의 뿌리”라고 짚었다.

‘갑과 을’이라는 비대칭적 관계를 중간에서 조정해 줄 만한 제도가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실효성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갑질이 일상화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갑질이) 개인의 인권이나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인 부분은 부족하다”며 “(제도적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일상 속 갑질을 경험한 피해자들이 이를 폭로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올려 대응하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대중적 망신주기’가 갑질의 궁극적인 해결방안은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조계원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SNS를 통한 갑질 폭로가) 개인적인 무력감을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실제로 바꾸지는 못한다”며 “순간적으로는 사과받을 수 있지만 결국 관심이 줄어들면 언제든 을들은 재생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일상 속 갑질이 낳는 폐해를 지속해서 교육하고, 법과 제도로 갑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송 교수는 “초등학교 때부터 서열화·위계화의 문제점을 인지시켜야만 고질적인 문화적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며 “교육 당국과 시민사회가 갑질의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갑이 권력을 남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법·제도적으로 이를 막는 한편, 직장의 경우 을의 입장에서 갑을 견제할 사내 기구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라고 전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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