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개 성조기 흔들며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 통과 촉구
금융 중심가 센트럴 일대 점령…전철역 입구 불 지르기도
시위대 규모는 상당히 줄어…"15일 시위가 분수령 될 것"
홍콩 도심 센트럴에 적힌 '5대 요구, 하나도 빠져선 안 된다' 구호 |
(홍콩=연합뉴스) 안승섭 특파원 = "5대 요구를 들어달라는 우리의 요구가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8일 홍콩 도심인 센트럴 차터가든 광장에서 만난 대학생 캐빈은 굳은 결의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홍콩 시위는 아직 '현재진행형'이었다.
지난 4일 홍콩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발표했지만, 시위대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너무 늦었고,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이들의 반응이었다.
이날 가장 많이 외쳐진 구호 중 하나이자 도심 곳곳의 벽 등에 적힌 구호는 '5대 요구, 하나도 빠져선 안 된다'(五大訴求 缺一不可)였다. 송환법 철회뿐 아니라 시위대가 요구하는 5대 요구를 모두 수용하라는 얘기다.
시위대의 5대 요구사항은 ▲송환법 공식 철회 ▲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의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 등이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송환법 공식 철회를 제외한 나머지 4개 요구를 모두 거부하고 있다.
성조기를 들고 있는 홍콩 시위대 |
길거리에서는 스피커로 미국 국가를 큰 소리로 틀어대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날 오후 차터가든 광장에서 열린 집회의 주제는 바로 미국 의회에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미 의원들에 의해 지난 6월 발의된 이 법안은 미국이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해 홍콩의 특별지위 지속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홍콩은 중국과 달리 관세나 투자, 무역, 비자 발급 등에서 미국의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시위 진압에 책임이 있는 홍콩 정부 관료나 경찰은 물론,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로서도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성조기를 들고 있던 한 대학생은 "미국 등 국제사회가 홍콩 시위 사태를 지켜보고 지지한다면 베이징 중앙정부도 홍콩에 함부로 무력개입 등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조속히 홍콩 인권민주주의 법안이 통과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홍콩 시위대가 들고 있는 영국 통치 시절 홍콩 깃발 |
다가가서 이 깃발을 든 이유를 물으니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의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일국양제는 1997년 홍콩 주권 반환 후 50년간 중국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되, 홍콩에는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한 것을 가리킨다.
자신을 24살 취업준비생이라고 밝힌 이 청년은 "중국은 영국에서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분명히 홍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이 깃발을 든 것은 바로 그 약속을 지킬 것을 중국에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 시위대가 적어놓은 '빌어먹을 경찰' 낙서 |
수만 명의 시위대는 홍콩의 금융중심지인 센트럴을 완전히 점령한 채 곳곳에서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자, 홍콩과 함께(Fight for freedom, Stand with Hong Kong)", "광복홍콩 시대혁명", "홍콩인 힘내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도심 곳곳에 자신들의 주장을 담긴 낙서를 하기도 했다.
한 지하철 역사 입구에는 'Fuck the PoPo'라고 쓰인 낙서를 볼 수 있었다. 곁에 있던 시위대에 물어보니 'PoPo'는 경찰(Police)을 뜻하는 은어라고 했다. 한마디로 '빌어먹을 경찰'이라는 뜻이었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느낀 것은 홍콩 정부와 경찰에 대한 시위대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점이다. 경찰이 시위 참가자를 죽인 후 이를 자살로 위장했다고 믿는 시위대도 있었다.
헬멧과 고글, 마스크를 쓴 대학생 람은 "최근 한 시체가 바닷가에서 발견됐는데, 경찰이 자살이라고 밝힌 이 사람의 두 손이 묶여있었다"며 "자살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두 손을 묶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날 애드머럴티역 등 도심 곳곳에서는 수십명씩 무리 지어 있는 폭동 진압 경찰을 볼 수 있었다.
홍콩 애드머럴티역 내의 시위 진압 경찰 |
경찰과 함께 시위대의 분노를 한몸에 받는 조직은 홍콩 지하철공사(MTR)였다.
시위대는 홍콩 지하철공사가 역내에서 시위를 금지하는 법원의 임시명령을 발부받은 것을 두고 공사가 홍콩 정부와 결탁했다며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지하철공사가 이날 센트럴 지하철역을 폐쇄하자 시위대는 센트럴역 입구 곳곳을 파괴했다. 역사 입구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스프레이로 '鐵狗官'(개 같은 지하철 직원들)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한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시위대가 쓰레기통과 폐품 등을 쌓아놓고 마구 두들겨 부수고 있었다. 시위대는 오후 늦게 이 역사 입구에 불을 질렀다.
홍콩 굴지의 은행과 글로벌 투자은행, 자산운용사 등의 건물이 즐비한 '아시아의 금융 허브'인 홍콩 센트럴의 지하철역 입구가 불에 탄 것은 홍콩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애드머럴티를 지나 완차이, 코즈웨이베이 등으로 진출했고,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코즈웨이베이 지역에서는 보도블록 등을 깨뜨려서 던지는 시위대에 맞서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홍콩 시위대가 써놓은 '개 같은 지하철 직원들' 낙서 |
이날도 시위대와 경찰의 격렬한 충돌이 있었지만, 시위의 열기는 한풀 꺾였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난 주말 시위 현장에 나왔을 때는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센트럴, 애드머럴티, 완차이, 코즈웨이베이 등의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이날 시위대의 규모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수만 명 정도로 보였다.
더구나 지난 주말 집회에서는 중장년층과 노년층이 상당수 눈에 띄었지만, 이날은 20대 젊은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 점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지난 6월 초부터 시작해서 넉 달째 접어들 정도로 시위가 장기화하고, 홍콩 정부가 시위대의 최우선 요구 사항이었던 '송환법 공식 철회'를 받아들이면서 이제 시위에 염증을 느끼는 시민이 늘어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주홍콩 한국 총영사관 관계자는 "주말 시위의 열기는 다소 꺾였지만, 아직은 사태의 전개 방향을 예단하기 힘들다"며 "민간인권전선이 예고한 15일 집회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민간인권전선은 6월 9일 100만 명 집회, 6월 16일 200만 명 집회, 8월 18일 170만 명 집회 등 대규모 집회를 주도한 재야단체이다.
만약 15일 시위에 이들 집회 못지않은 대규모 인원이 참여한다면 홍콩 시위의 열기가 꺾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만, 15일 집회 참여 규모가 확연히 줄어든다면 시위의 동력이 떨어졌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홍콩 도심 센트럴의 시위대와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 |
미국에 지지 촉구하는 홍콩 시위대의 구호와 성조기 |
ss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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