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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1987년 대선 5일전, CIA 보고서 "靑도 노태우 당선 회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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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전문입수 - "盧는 개혁적, YS·DJ는 극단적이며 논쟁적"

미 정보기관, 여야 넘나들며 직선제 선거동향 파악

면밀 분석 위해 국내 유권자 분포까지 세세하게 기록

중앙일보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손을 치켜들고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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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인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6·29선언’의 한 대목이다. 1971년 이후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치러진 제13대 대선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득표율은 36.6%였다. 당시 투표율은 89.2%. 현재로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수치다. 그만큼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선거였다.

‘양김’으로 불렸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는 28.0%,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27.0%에 그쳤다. 정치적 동지이자 맞수였던 두 거물 가운데 승자는 없었다. 두 사람의 권력욕이 낳은 ‘양김의 분열’은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를 갈구했던 야권 진영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작성했던 1987년 대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여권이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폭로가 나온 것이다. 올 7월 20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정보 공개 요구를 통해 입수한 미국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하CIA) 자료를 토대로 “(1987년) 기념비적인 선거를 앞두고(한국)여당이 투표결과 조작 등 부정선거를 구체적으로 기획했다”고 보도했다.



선거 무효 가능성 수차례 언급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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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정보실에서 작성한 ‘한국 유권자 분포’ 분석 보고서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평가가 나온다. / 사진:www.scribd.com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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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만의 직선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한국 유권자 분포 지형을 분석하는 보고서로 이어진다. CIA 정보실은 1986년 12월 미국 문화정보국(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이 한국인 2000명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1985년 9월 [경향신문] 여론조사(1000명 대상)를 기초로 클러스터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클러스터 분석은 다양한 특성을 지닌 대상을 집단으로 분류하는데 사용하는 통계 기법이다.

CIA는 해당 보고서에서 “경제적 성장과 전후(post-Korean war generation) 세대의 출현이 유권자 구성을 크게 달라지게 했다“고 봤다. 또한 “1971년과 비교해 모든 사회적 계층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며 초등교육과정을 밟는 비율이 1971년 36%에서 1987년 62%로 증가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 같은 변화를 토대로 CIA는 1971년과 비교해 한국 유권자를 분석했다. 예컨대 ▷노동자 ▷화이트 칼라 ▷여성 ▷농민 ▷학생 등으로 나눠 각 계층의 특성과 예상 투표 성향 등을 논했다. 가령 1971년 22%에서 32%로 늘어난 노동자 계층은 나이와 경제적 수준, 성별에 따른 성향을 분석했다.

CIA는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적 평등과 개혁에 관심이 있는 젊은 여성 노동자는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 김대중과 같은 후보에 흔들릴 것”이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노동자층은 외국산 제품과의 경쟁에서 보호와 복지 혜택 등을 내세운 야당의 공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CIA는 화이트칼라 계층이 막판까지 부동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점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화이트칼라는 박정희·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로 야당 선호 성향을 보였다. CIA는 “온건한 김영삼 후보나 카리스마가 있고 개혁 성향의 김대중 후보 등 야당에 투표할 것으로 본다”고 예측했다.

변수도 언급했다. CIA는 “과거 조사 데이터와 최근 대선 여론조사에 근거하면 화이트칼라 계층은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점진적 개혁의 소망, 야당 분열의 불만족에 따라 여당 후보인 노태우에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화이트계층에서) 김대중은 불신 받고 있고, 김영삼의 리더십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평가가 있으며, 노태우는 민주적인 개혁을 하겠다는 데 회의적인 대중의 시각에 직면해 있다”며 “우리(CIA)는 선거 전날까지 화이트칼라 유권자가 유동층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고 전망했다.



광주 항쟁을 폭동이라 표현… 全 연관성도 언급



CIA는 유권자 가운데 3%(76만 명)에 불과하지만 선거에서 중요한 그룹으로 꼽힌 학생층은 대부분 야당 후보를 찍을 것으로 봤다. 그렇지만 일부 학생층에 대해서는 “노태우 후보를 완전한 민주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받아들이는 역할로 계산하고 있을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1987년 대선을 전후해 작성된 CIA 보고서를 전반적으로 훑어보면 CIA는 부정선거에 대한 우려는 지속적으로 보내면서도 이를 딱히 제지하거나 경고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여당 후보인 노태우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가 눈에 띄는 한편, 야당 후보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다. CIA는 ‘유권자 분포 지형’ 분석 보고서에서 미 대사관 보고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태우는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리더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노동과 사회 복지 이슈에 관심이 있고, 평양(북한을 의미)과의 대화처럼 다른 영역에서의 유연성도 보여주고 있다. 야당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미군 철수나 대기업 해체 등 야당의 정강과 같은 더 극단적이고 논쟁적인 주제에 집중한다.”

12월 초에 작성된 CIA 정보팀 분석 보고서에는 “여당이 대대적인 부정행위(wholesale cheating)를 자제하는 것처럼 한국 국민들에게 인식되기만 하면 근소한 차이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한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한다”고 전망했다. 이어 “그럼에도 노태우 후보는 우세를 유지하면서 시위의 부활을 막자면 정치 개혁 공약에서 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마치 선거 전략을 조언하는 듯한 모습이다.

대선 이후인 12월 18일 ‘국가정보 일일보고’에서는 “3위로 선거를 끝낸 김대중은 시위에 대한 정부의 과잉반응이 폭넓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더 도발적인 전략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고, “김영삼은 대중의 신중한 반응에 조심스러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대중과 함께 반(反)노태우 시위에 나설 경우 온건한 야당 세력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진단인 것이다.

CIA 문서에서 눈에 띄는 점은 광주 항쟁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12월 24일, 대선 이후 노태우 당시 당선인의 과제에 대해 분석하는 보고서에서 CIA는 많은 정부 관계자들이 전두환의 퇴장을 군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폭동(riot)을 잔혹하게 진압하는데 그(전두환)의 권력과 역할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군의 이미지는 더럽혀졌다”고 설명한다. 1987년 당시 광주 항쟁을 폭동이라 보고 있는 미국의 시각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전두환의 연루를 은연중에 드러낸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CIA는 같은 보고서에서 “선거 결과에 불만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이 극단적인 수단을 꺼낼 수 있다”면서 한국인이나 미국 시설에 대한 테러 공격도 가능하다고 봤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5년가량 지난 시점에서 이 같은 분석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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