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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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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시집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 펴낸 박상순 시인

극단적 신비화와 오독에 갇혔던 50편의 시, 전면 한글화·재해석

당시 예술사조의 흐름 속에서 회화와 교차해 읽어낸 첫 시도

“그의 시가 외딴섬에 놓인 건 모더니즘 시에 대한 몰이해 탓”

경향신문

대학 시절 미술실에서의 이상. 이상은 조선예술전람회에 입상할 정도로 실력 있는 화가였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건축을 전공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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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100년 전 사람입니다. 그 당시엔 잠깐 난해할 수는 있지만 이후 세대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는데 외딴섬에 놓인 것은 모더니즘 시에 대한 몰이해가 있었다고 봐요. ‘요절한 천재’라는 말 이면에는 극단적 신비주의·몰이해의 영역에 가둬버린 측면이 있죠.”

한국문학사에서 이상처럼 신비화된 시인은 없을 것이다. 이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실험적인 연작시 ‘오감도’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 독자 항의로 중단됐다. 당시 독자에 비해 우리는 이상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까. 이상의 시는 여전히 ‘난해’라는 유리벽 안에 박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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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인(57)이 이상의 시를 유리벽에서 꺼내기 위해 나섰다. 이상의 시 50편을 전면 한글화하고 해석한 시집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민음사)를 출간했다. 박상순은 당시 모더니즘·초현실주의·다다이즘 등 세계 예술사조의 흐름 속에서 이상의 시를 재해석했다. 또 이상이 시 곳곳에 숨겨놓은 1930년대 식민지 서울의 현실을 조각조각 찾아냈다.

이상은 서구적이고 모던한 작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시엔 한자어가 많다. 동양 문예사상뿐 아니라 ‘천문’ ‘부첩(부적)’ 등 <주역>에 나오는 단어들도 등장한다. 박상순은 “이상은 서구적 실험성과 동시에 동양적 전통을 품고 있어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상순은 이상의 소설·산문 등을 검토해 그가 쓴 어휘를 추적하고, 동서양 문예사조를 훑으며 이상의 시를 해석했다. 일례로 ‘위독: 봄을 사다’란 시의 본래 제목은 ‘매춘(買春)’인데, 이제껏 성매매(賣春)를 지칭하는 말을 바꾼 말놀이로 해석됐지만, 박상순은 겸재 정선이 그림을 그린 <24시품>이란 문예이론서를 참고해 ‘봄(술)을 사다’란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은 문학가 이전에 화가였다. 조선예술전람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 있는 화가였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건축을 전공하고 조선총독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문학을 해야 하나봐”라고 말한 뒤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박상순은 여러모로 이상과 닮았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시인이자 편집자이자 북디자이너로 일했다. 시인과 화가의 눈을 동시에 지닌 그는 이상의 시를 해석할 적임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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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를 펴낸 박상순 시인. 김정근 선임기자


“이상의 시는 시각 중심입니다. 이상을 회화와 문학을 교차해 해석한 것은 처음 시도되는 일입니다. 빅토르 위고, 윌리엄 블레이크 등 시와 그림을 함께 창작한 예술가들과 비교하며 이상의 시를 해석했어요. 20세기 초반 서구 문학과 미술의 경향 내에서 이상의 좌표가 어디쯤인지 그려주고자 했습니다.”

이상은 일본어로도 시를 남겼으나 이번 시집엔 한글로 쓴 시 50편만 담았다. 처음 한글로 발표한 시 3편 가운데 하나인 ‘1933, 6, 1’에서 이상은 “무게를 재는 천칭 위의 과학자, 뻔뻔히 살아온 사람에게 벗어나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박상순은 “(총독부를 나온) 1933년 이날의 다짐은 일본어로 써서 발표한 시와의 이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상은 오랫동안 신비화와 오독 가운데 놓여 있었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나는 장난감 신부와 결혼한다(I wed a toy bride)’는 그동안 손쉽게 ‘성도착’과 같은 관점에서 해석됐지만, 박상순은 당시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인간 신체를 마네킹으로 표현한 흐름 속에서 시를 해석한다.

“한국 근현대 문학교육은 편파적으로 이뤄졌어요. 낭만주의 서정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중심으로 교육이 이뤄지면서 모더니즘 계열 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문학교육 내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이상은 이름처럼 ‘이상한 시인’으로 여겨진 거죠. 하지만 이상의 시엔 1930년대 식민지 한반도의 역사적 현장이 그대로 들어있습니다.”

‘거리 밖의 거리’엔 빈민굴의 풍경이, ‘파첩’엔 이상이 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하며 겪은 일제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의 이중적 고뇌가 나온다. ‘산책의 가을’에는 “인쇄소 속은 죄 좌(左)다…그런데 웬일인지 그들의 서술은 우(右)다. 나는 이 방대한 좌와 우의 교차에서 속 거북하게 졸도할 것 같길래…”라는 구절이 있는데, 박상순은 “당시 청계천 일대 인쇄소 직공들의 노동운동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좌익 세력이 주도했다고 신문이 발표했다”며 “일차적으로 신문 활자가 찍히는 장면을 그리지만 노동운동의 역사도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저낙원’에선 여성들이 겪은 차별적 현실이 드러나며 당시 최초로 피임약과 피임법을 보급한 미국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의 ‘BC(Birth control)’가 등장하기도 한다.

‘한글화’했다고 해도 이상의 시를 읽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풍부한 도구를 확보한다면, 난해함 뒤에 숨은 그의 진면목이 조금씩 보인다. 가난 때문에 유학을 가지도 못하고, 화가가 되지도 못했던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상이 “나는 자신나의시가 차압당하는꼴을 목도하기는 차마 어려웠기때문에”(‘1933, 6, 1’) 당대 현실을 자신만의 언어와 이미지로 치열하게 적어내려가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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