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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금융디지털이 불편한 자산가들…"내 재산 드러날까"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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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증권제도 도입에 "종이화폐도 사라지나" 걱정

지난 16일 금융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전자증권시대 개막을 선포하면서 앞으로는 최소 상장사에 한해서는 실물증권(종이증권)이 발행되지 않는다. 집에 종이증권을 보관하고 있다면, 서둘러 명의개서대행기관(예탁결제원·국민은행·하나은행)에 방문해 등록해야 한다. 이 또한 주주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만 전환이 가능하며 명부에 없는 사람은 매매기록이 없는 이상 전환이 불가능하다. 설령 돌아가신 부모님 댁 장롱 속에서 삼성전자(005930)주식 수천장이 발견된다고 해도 자산으로서 가치가 없다. 종이증권은 말 그대로 휴짓조각이 된다.

18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전자증권으로 등록된 상장사 주식 비율은 지난 16일 기준으로 99.2%에 그치고 있다. 0.8%의 주식은 전자증권제도를 인지하지 못한 투자자의 주식이거나 가치가 거의 없는 물량으로 추정된다.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환하지 못한 물량일 수 있다.

현재 국내 증시의 시가총액 1598조원의 0.8%가 종이증권으로 남아 있다면, 이 주식의 가치는 12조7800억원에 이른다. 물론 전환되지 않은 주식가치는 이보다는 훨씬 낮을 가능성이 높다. 비싼 주식은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전환했을 것으로 보는 게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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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발행된 삼성전자 주권. /한국예탁결제원 증권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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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PWC는 전자증권제 전환으로 인해 얻는 이익은 5년간 약 9045억원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실물증권을 제조·보관, 입출고, 명부 작성하는 운용 비용에다 도난 및 위변조에 대비하는 비용, 주식발행 과정에서 지연되는 일정에 따른 금융비용 등을 모두 합친 숫자다. 다소 과장됐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전자증권제 도입으로 일처리가 간편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급속한 디지털화(化)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금융자산이 많은 부유층 중심으로 "정부가 나중에 달러나 원화 등 화폐도 전자화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강남권의 한 프라이빗 뱅커(PB)는 "회사 방침에 따라 연초부터 주요고객에게 '혹시 종이증권이 있으시면 등록해달라'고 했는데, 적지 않은 고객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면서 "종이증권을 일부러 찾아놓은 건데 무슨 의도로 등록하라고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이 PB에 따르면 일부 자산가는 정부가 전자화폐제까지 도입할지 모른다고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사실 현금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 명분으로 전자화폐제를 도입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면서 걱정하는 자산가들이 있다"면서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고 말한 이도 있다"고 했다. 자산가들은 자산을 최대한 축소하고 싶어하는데 전자화가 이뤄지면 이게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전자화폐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가상화폐와 구분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라고 부르는데, 스웨덴과 중국이 공식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CBDC는 기존 화폐 발행의 일부분을 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해 3월 인사청문회에선 CBDC 발행을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갑론을박이 이어지자 지난 8월 30일 통화정책방향 간담회에서는 "CBDC는 그냥 하나의 안으로 나온 것이지 현재 실현 가능하다고는 생각 안 한다"고 물러섰다.

만약 CBDC가 기존 종이화폐를 전면 대체한다면, 유예기간을 둔다고 해도 자산가들이 느끼는 공포심은 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4년 25.8%에서 2018년 67%로 꾸준히 오르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권종이 95~107%를 기록하는 것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다. 환수율이란 화폐 발행 이후 한국은행에 돌아오는 비율을 뜻한다. 5만원권 환수율이 낮다는 것은 누군가의 집 안에 대거 잠들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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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가들이 전자증권제에 불편한 기류를 보이는 이유는 종이증권이 증여 수단으로 활용돼왔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종이증권을 주고받으면 정부는 소유자를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양도세 및 거래세를 물릴 수 없고, 증여수단으로 활용해도 정확히 잡아내기 어렵다. 한 PB는 "들키지 않고 증여 수단으로 삼는 노하우가 있는데 자산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꼼수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전자증권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며 "전자화폐제와 같은 얘기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안재만 기자(hoonpa@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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