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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왜냐면] ‘9·19 군사합의’ 한반도 평화 정착의 첫걸음 / 정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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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한범
국방대학교 교수


격세지감이다. 천지개벽 정도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지난날과는 확연한 차이를 느낀다. 평화가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북한의 핵무력 도발에 긴장하던 것이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우려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판문점 정상회담으로부터 시작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9·19 군사합의’의 성과다.

지난해 4월27일 판문점 선언 이전의 남북관계는 핵실험, 아이시비엠(ICBM)급 탄도미사일 발사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북한의 도발로 고도의 군사적 긴장상태였다. 2016년부터 북한은 무려 세 차례 핵실험과 30여회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급기야 2017년 11월29일에는 화성 15호를 발사하고 ‘핵무기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어두웠고, ‘대북 선제공격론’마저 제기될 정도로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험이 고조됐다. 다행히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긴장은 상당 부분 완화됐지만, 남북이 대치한 분단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우발적 충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들이 상대의 의도를 오판한 우발적 상황에서 발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해체시켰고 유럽 전체의 기나긴 암흑기를 가져왔던 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영국의 해군 군비경쟁에서 비롯됐다. 고대 그리스의 몰락을 가져온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쟁은 결국 군비통제의 실패를 의미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처럼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잔과 같은 불안한 평화를 제도화하고, 우발적 위기상황에서 무력충돌의 위협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추진된 것이 남북 군사당국 간 ‘9·19군사합의’라고 할 수 있다.

‘9·19 군사합의’는 안보를 강화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서 ‘군비통제’의 관점을 채택한 것이다. 흔히들 튼튼한 안보를 위해서는 군비를 강화해야만 한다고들 얘기하지만, 군비경쟁은 상대로 하여금 더 높은 수준의 무장을 하도록 하는 안보 딜레마의 위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인으로 인한 우발적 충돌과 전쟁의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냉전시대 군사전략가였던 토머스 셸링조차도 그의 저서 <전략과 군비통제>에서 전쟁위험을 감소시키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군비증강보다는 군비통제 조치를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9·19 군사합의’의 초기 이행 성과는 성공적이다. 지난해 11월1일부로 남북은 지상·해상·공중에서의 군사력 운용을 제한하는 완충구역을 설정하고 상호 간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했다. 현재까지 한건의 위반 없이 합의사항이 이행되고 있다. 군사적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내 11개 감시초소도 성공적으로 철수되었고 화살머리고지 일대의 남북 공동 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및 도로 개설 등이 성과를 내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도 무장이 완전히 해제된 평화의 공간으로 변모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남북 간 우발적 충돌 원인을 차단해 ‘전쟁의 위험’을 실질적으로 감소시켰다는 점이다.

‘9·19 군사합의’는 유엔에서 군비통제 추진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될 정도로 다양한 수단을 통한 협의, 실질적인 이행, 그리고 검증까지 군비통제의 전 과정이 다 포함돼 있다. 남·북·유엔사 간 협의체를 구성해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와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철수에 대한 상호 검증도 완료했다. 그동안 수많은 남북 합의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이행되지 않았던 군비통제 관련 이론적 조치들이 실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1주년을 맞이하는 ‘9·19 군사합의’는 안보 딜레마를 방지하여 전쟁의 위험을 낮추는 안전장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지상·해상·공중에서의 완충구역은 남북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명실상부한 평화적 공간이 됐다. 비록 최근에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등의 발사가 있었으나,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접경지역 일대에서는 지난 1년간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단 한건의 불미스러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남북 군사당국 간 항시 소통이 가능한 동·서해 지구 군통신선과 국제상선공통망이 우발적 충돌 방지 기능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비통제 효과에 기초하여 설계된 ‘9·19 군사합의’가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험성을 현저하게 낮춘 것이다.

‘9·19 군사합의’ 이후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그동안 우리가 상상하고 꿈꿔왔던 것들이 다소나마 현실로 다가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해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는 그 순간까지 ‘9·19 군사합의’를 발판 삼아 평화의 길을 묵묵히 담대하게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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