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6 (월)

"경제위기 온다면…무역시스템 붕괴·스타트업 파산이 뇌관될것"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폴 크루그먼 인터뷰 ◆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은 한 해 우리나라 경제는 두 가지 공포와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할 가능성이 높다. 먼저 'R(Recession·경기침체)의 공포'.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2.2%로 전망하지만, 해외 투자은행(IB)과 국내 민간 경제연구기관 중에서는 1%대를 예상하는 곳도 적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성장이다.

또 하나는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함으로써 나타나는 'D(디플레이션·Deflation)의 공포'.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경제가 활력을 잃고 가계와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줄이는 '디플레이션 악순환(Deflation spiral)'에 빠져 과거 일본에서 나타났던 장기 불황이 우리나라에서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의 수출 통제에 이르기까지 주변 여건은 한국에 호의적이지 않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를 최근 서울 여의도 콘래드서울 호텔에서 만나 우리나라 경제와 글로벌 경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었다.

그는 한국이 디플레이션에 빠지지 않으려면 재정 정책뿐만 아니라 제로금리까지 검토하는 과감한 통화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장 나타나는 세계 경기침체 조짐은 없지만, 수익을 못 내는 정보기술(IT) 스타트업 파산과 에너지 기업 부채 등 여러 작은 리스크들이 동시에 터질 경우 경제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크루그먼 교수와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한국 정부 씀씀이가 경기 부양에 별 영향을 못 주는 복지 분야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있다.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단기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투입을 인프라스트럭처 부문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인프라 투자도 경기 부양으로 이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과거 일본은 인프라에 과잉 투자라 불릴 만큼 많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디플레이션을 막지 못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겠지만, 이 역시 효과적인 경기 부양 정책인지 여부가 확실치 않다. 단기적으로 투자 승수 효과가 큰 분야에 나랏돈을 써야 한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역제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정말 터무니없는(outrageous) 충격적인 행동이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위배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국의 경제력을 남용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미국 대통령도 유사한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 국제 경제에서 '게임의 법칙'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 경제의 앞날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은 것으로 안다.

▷세계 경제와 달리 미국 경제가 그동안 호황을 누린 건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재정 정책에 비해 경제성장률은 오히려 기대에 못 미친 측면도 있다. 재정 정책 설계부터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건 정책 불확실성이다. 무역 정책뿐만이 아니라 규제를 비롯한 모든 정부 정책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상하기 힘들다 보니 기업이 투자를 유보하고 있다. 심지어 자동차 생산 기업이 배출가스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하자 대통령이 이러한 결정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더 나빠질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다.

―또 어떤 위험 요인이 있다고 보나.

▷정부 부채는 괜찮다고 본다. 오히려 예의 주시해야 할 부문은 기업 부채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부각되지 않고 있지만, 기업대출이나 '그림자금융(비은행 금융중개)' 부문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 수 있다. 지금은 과거에 나타났던 IT 버블 붕괴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같은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불황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당장 불황이 올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가지고 있는 통화 정책 여력이 얼마 없어 재정에 기대야 하는 상황인데, 문제는 미국 정치권이 둘로 쪼개져 있는 데다 재정 정책을 설계하는 이들이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 경제를 이끌어온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의 성장이 한계에 달했다는 평가가 있다.▷그들은 현금부자 기업이기 때문에 파산할 위험은 없다고 본다. 그들보단 한 번도 돈을 벌어보지 못한 스타트업, 특히 '테크(tech) 회사'라고 광고하기에만 급급했던 기업이 더 문제라고 본다. 심지어 우버도 올해 들어 계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 분야 기업 외 에너지 기업들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에너지 부문에서 투자가 과도하게 이뤄진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에 따른 기업 파산 위험도 크다고 본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언급하는 위험들이 당장 과거에 버금가는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보호무역주의 확산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둘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이 갖는 문제다. 국민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데도 법률상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이 부여되다 보니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내년에 트럼프 대통령이 낙선한다면 지금의 무리한 정책들을 일부 되돌릴 수야 있겠지만, 과거와 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내년에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즉각 관세 수준을 내리는 건 꺼릴 것이다. 국민이 변화에 불만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역 시스템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관세 수준이 급격히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한 국가의 리더가 '정상화(Justification·트럼프 대통령이 보호무역 정책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를 원하면 언제든 무역 조건이 급변할 수 있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향후 정책적으로 과거 상태로 돌아간다 가정해도 과거와 완전히 같은 상황, 과거와 같은 (무역 시스템에 대한) 자신감은 가질 수 없게 됐다. 이는 항구적인 피해다. 근본적인 불신이 자리 잡았고, 신뢰가 회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도 세계 무역 파트너 사이에서 신뢰를 잃은 상황인가.

▷그렇다. 한국에 대해 반도체 소재 수출을 막은 조치로 일본은 이제 신뢰할 만한 무역 파트너가 될 수 없게 됐다. 일본은 미국이 다른 나라에 관세를 부과한 것과 똑같은 행위를 했다. 일본이 뒤늦게 조치를 되돌린다 해도 과거 같은 신뢰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 지난 100년도 자동화로 일자리 소멸…AI 두려워말라
미래기술 가시적성과 더뎌도 인내심 갖고 계속 투자해야

전 세계 경제는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평가를 받는 IT를 대신할 새로운 모멘텀을 찾고 있다. 인공지능(AI)·블록체인·플랫폼 등 다양한 미래 기술이 언급되고,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R&D) 등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는 중에도 이를 확실히 극복할 해답이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한 감이 있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 교수는 "좀 더 시간을 갖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티핑 포인트(전환점)'가 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미래 먹거리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는 취지다. 그는 또 자동화·기계화로 인한 일자리의 소멸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견해도 밝혔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언급되지만, 세계 경제를 이끌 동력이 보이진 않는다.

▷1980년대를 떠올려 봐도 많은 기술이 등장했지만, 바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컴퓨터가 있어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AI나 머신러닝도 마찬가지일 거다. 엄청난 경제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잠재력이 폭발하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 퍼스널 컴퓨터(PC) 혁명도 1980년대에 기술 발전이 이뤄졌지만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든 뒤다.

―자동화·기계화로 인한 일자리 소멸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기계가 어느 측면에서는 사람보다 나아지겠지만 아직은 멀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소멸은 100년 이상 계속 진행 중이란 것이다. 항구의 물류 선적만 봐도 수십만 개 일자리가 자동화로 인해 사라졌다. 지금 항구를 가보면 사람은 하나도 없고 기계만 돌아가고 있어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오늘날의 기술 발전이 과거의 기술 진보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없앨 것인지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반글로벌화 현상으로 국가 간 지식 공유가 어려워졌다.

▷그렇다. 1980년대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모두 통합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있었다. 최근 20여 년간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봐선 일시적 현상이었을 수 있다. 과거처럼 통합적으로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재현하려면 지식의 공유와 확산이 필요하다. 자본에 집중하는 세계은행(WB)을 대신해 글로벌 지식 전파를 담당할 기관을 설립하는 게 방법이 될 것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는…
△1953년 뉴욕 출생 △1974년 예일대 경제학 학사 △1977년 MIT 경제학 박사 △1982~1983년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1984년 MIT 경제학 교수 △1991년 전미경제학회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 △2000년 프린스턴대 경제학 교수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2015년 뉴욕시립대 경제학 교수

[이유섭 기자 / 문재용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