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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영양제 먹고 '뇌섹남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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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김우현씨(24)는 가방에 ‘약통’을 챙겨 다닌다. 몸의 어느 곳이 아파서 먹는 약은 아니고 일종의 영양제들이다. 군복무를 마친 뒤 대학에 복학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전공서적을 펴고 공부를 시작한 김씨는 굳어 있던 머리가 예전만큼 돌아가지 않는다고 느꼈다.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수업 진도도 따라가기가 버겁던 차에 인터넷에서 본 두뇌활동 개선 보조제 목록을 발견한 것이 영양제 섭취를 시작한 출발점이 됐다. 흔히 ‘누트로픽(Nootropic)’이라는 용어로 통용되는 이들 보조제가 집중력을 높이고 가라앉은 기분을 전환하는 등의 효과가 있다는 글들을 읽게 된 것이다.

입소문 타면서 복용 사례 늘어

김씨는 “플라시보(위약 효과)인지도 모르지만 나한테 도움될 듯한 보조제를 직접 여러 번 먹어보면서 실제 효과가 나타나나 실험해 보니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종류는 집중력을 높이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는 학업이나 취업준비로 스트레스를 받는 주변 사람들 중에서도 효과를 봤다는 이들이 입소문을 내면서 이러한 영양제를 복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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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누 트로픽의 한 종류/해외직구 사이트 화면 캡쳐


누트로픽은 의학적으로 엄밀하게 개념이 정립된 용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뇌를 비롯한 신체의 인지기능, 특히 기억과 학습, 동기, 창의성, 집중력 등을 증진하는 약물이나 기타 물질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다양한 성분들 중에는 치매나 뇌졸중 같은 질환에 처방되는 일부 의약품 성분도 포함돼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건강기능식품 수준으로 인체에 유용한 기능성을 ‘가질 수도 있는’ 정도여서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 각종 식물(허브) 추출물 등 다양한 원료에서 나온 성분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인체 내에서 어떤 기능을 어느 정도 범위로 나타내는지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누트로픽은 영양제·보조제 시장이 큰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한 이래 국내에도 상륙해 번져가고 있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알파GPC(콜린알포세레이트)와 유리딘을 함께 복용하는 ‘미스터 해피 스택’이 가장 대표적인 복용법 중 하나다. 알파GPC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으로 변하는 물질이고, RNA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유리딘은 뇌의 수용체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줘 기억력을 높이고 우울감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이들 보조제 조합을 판매하는 업체들의 주장이다. 이들 성분은 모두 인체 내에서 만들어지는 성분이기 때문에 보조제를 먹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농도를 높이면 효과가 더욱 높아진다는 주장도 뒤따른다.

하지만 과연 다양한 누트로픽이 실제로 기대만큼의 효과를 낼까.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신재경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신재경 원장은 “지금까지 나온 연구결과를 두고 봤을 때 유해할 정도로 남용하지 않는 선에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견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지기능을 개선하는 효과가 뚜렷하게 입증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누트로픽의 원조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페인에 비해서도 효과가 높지 않다. 신 원장은 “오히려 카페인은 다양한 효능이 오랜 기간의 연구로 입증됐지만 지금 유행하는 대표적인 누트로픽들은 그렇지 못한 상태라 반짝 유행한 뒤 사라지는 건강기능식품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설령 효과가 있다고 치더라도 부작용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트로픽을 사용하는 것은 윤리적인 정당성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영인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이들 물질 중 대부분은 효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건강한 사람들이 인지기능의 증진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마치 스포츠에서 근육강화제 등을 통해 기록을 경신하는 것처럼 윤리적 정당성 논란이 있다”며 “건강의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으므로 삼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도 누트로픽 제조·판매업자들과 소비자들에게 광고·판매사기 위험을 경고한 바 있다. 미국의학협회(AMA)도 건강한 일반인들에게는 누트로픽을 사용하지 않도록 대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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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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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강화제처럼 윤리적 정당성 논란”

그럼에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에서 퍼지는 마케팅 문구에 솔깃해 누트로픽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누트로픽인 알파GPC만 보더라도 국내에서는 의약품으로서의 목적 및 사용 외에 성분 용량을 줄인 건강기능식품으로 판매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영양제 해외직구 시장의 성장에 힘입어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영양·보충제 업체들이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개원의는 “최근 내원해 상담하는 환자 중 인터넷에서 봤다면서 이런저런 누트로픽들이 도움이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상당히 늘었다”면서 “그럴 때마다 지금 처방하는 약이 효과나 안정성 면에서 더욱 입증된 것들인데 가격에 비해 효과도 미미한 보조제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설득하지만 내 말을 못미더워하는 경우도 보인다”고 말했다.

해외직구로 구매하는 누트로픽의 가격이 국내의 일반적인 건강기능식품보다는 저렴한 수준이기 때문에 효과가 있으면 좋지만 ‘아님 말고’라는 생각에서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경우도 많다. 일례로 도파민(성취 욕구와 관련된 신경전달물질)의 원료가 되는 티로신 성분 영양제의 가격을 보면 고함량의 해외 제품이 국내 제품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알파GPC 등 의약품의 원료여서 국내에서는 아예 건강기능식품으로 판매할 수 없는 제품들은 소비자들이 전량 해외직구로 사서 복용하는 현실도 무시하기 어렵다.

식품의약 당국으로서는 일반인에게 굳이 필요성이 밝혀지지 않은 성분의 누트로픽을 건강기능식품으로 허용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해외업체의 사실상 국내 시장 진입을 방관해야 할지 딜레마에 놓이게 된 셈이다. 해외직구로 소비되는 영양제 시장의 규모는 연간 5000억원에 달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알파GPC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라는 전제로 건강기능식품 신청을 일단 유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식약처 관계자는 “건강기능식품이 의약품과 완전히 똑같으면 안 되므로 건강기능식품으로 인정했을 때 의약품과 시장이 겹치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약품 관련 부서와 관계자들의 의견수렴을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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