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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만두 500개 빚어"…해외공관·지사는 여전히 '직장갑질'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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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병 갑질' 박찬주 이후에도 해외선 직장갑질 여전

대사 부부, 해외 공관 요리사에 일반식 해달라 요구

거절하자 여름에 주방 에어컨 끄는 등 지속적 괴롭힘

"한인사회 좁아 신고 어려워…신고 대책 마련해야"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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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지난 2017년 8월, 박찬주 전 육군 대장 부부의 이른바 ‘공관병 갑질’ 사건이 폭로된 이후, 정부가 관련 근절 대책을 발표했지만 해외 공관에서 일어나는 대사들의 부하직원에 대한 횡포가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사기업 해외지사에서도 폭언과 괴롭힘이 일어났으며 문제제기한 직원을 고소하는 사례도 나왔다.

이들의 제보를 공개한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는 해외에선 특히 한인사회가 좁아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신고하기 어렵다며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기 위해선 정부가 해외 공관을 전수조사해 갑질을 적발하고 신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계약에도 없는 대사부부 밥제공 거절했더니…

요리사 A씨는 3년 전 모 해외 대사관저 요리사로 일을 시작했다. A씨가 2016년 맺은 계약서에는 “공관장(배우자) 및 가족의 지시를 따르고, 일상식(부부 가족의 식사)을 (준비)한다”고 적혀 있다. A씨는 대사 가족의 점심과 저녁을 만들어 제공했다.

2017년 박 전 대장 부부가 공관병들에게 “100개가 넘는 모과를 깎고 썰어 모과청을 만들라”고 지시한 ‘공관병 갑질’사건이 터졌다. 이후 정부가 갑질근절 대책을 발표하면서 해당 조항은 “공관에서 주최하는 관저 내외 행사의 기획 및 시행과 관련된 제반 업무”로 바뀌었다. ‘배우자 및 가족, 일상식’이 들어가 있는 조항이 삭제된 것이다.

새로 부임한 대사 부부는 일정 금액을 받고 공식적인 근무시간에 점심과 저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계약서 조항에는 없는 내용이었지만 A씨는 계약이 되지 않을 것이 두려워 응했다. 하지만 주 업무와 부부 가족의 식사까지 준비하느라 시간외 근무가 많아졌고, 이로 인한 시간외 수당을 국비로 받는 게 A씨에겐 부담스러웠다. A씨는 대사 부부에게 “업무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돼 일상식을 제공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 식사 제공을 중단하자 대사 부인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여름철에도 불을 쓰는 더운 주방 에어컨을 끄는가 하면, 돌솥밥을 준비했는데 덥다며 갑자기 공깃밥을 내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전임 대사 부부와 직원들이 A씨를 ‘쉐프’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대사 부인은 ‘당신’ 혹은 ‘자기’ 등의 호칭을 썼다.

대사 부부는 휴가를 떠나며 A씨에게 “만두 500개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A씨는 일정이 겹쳐 다음 주에 만들겠다며 거절했지만 휴가에서 돌아온 대사 부인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며 또 괴롭혔다. “근무시간에 맞게 업무조정을 하는 것은 요리사의 결정권”이라고 항의했으나 대사 부인은 “어디다 대고 말대꾸예요. 내가 결정해요. 자기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며 A씨를 질책했다. 대사 부인은 A씨에게 매일매일 업무보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A씨도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담당 서기관에게 근로계약서의 당사자가 아니고 대사관 직원도 아닌 대사 부인이 자신에게 지시를 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문제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2017년 정부 지시로 계약서에는 배우자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고 돼 있지만, 관저 요리사 운영지침은 그대로 ‘공관장(배우자)의 지휘, 감독을 따른다’고 나와 있다는 이유다.

A씨는 대사 부인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대사 부인은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이어서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A씨는 대사를 찾아가 불편사항을 얘기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대사는 “부인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라며 떠나도 좋다고만 했을 뿐이다. 결국 대사 부인의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고 A씨는 사직서를 냈다.

관저 요리사에 대한 차별도 심각했다. 2년이 지난 대사관 행정직원들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지만, 관저 요리사는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행정직원들은 현지 법령에 따라 휴게시간 포함 하루 8시간 근무하고, 관저 요리사는 한국 노동법에 따라 휴게시간 포함 9시간을 일해도 재외공관담당관실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A씨는 전 세계 관저 요리사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갑질을 바로잡기를 기대하며 정부 기관에 신고했다.

◇케냐 출장가는데 예방접종도 안 해줘…“군대식 스타일일 뿐 문제 없어”

‘해외 갑질’은 사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한 대기업 네덜란드 지사에서 일하는 B씨와 동료들은 지사장의 폭언과 갑질에 시달렸다.

지사장은 업무 중 실수가 있으면 “운하로 뛰어내려라”, “머리도 나쁘면서 어떻게 대학에 들어갔느냐”, “정신을 완전히 개조해야 한다”는 등 인격 모독성 폭언을 해왔다. 아프리카 케냐에 출장을 가기 전 필요한 예방접종을 본인은 받고 B씨는 해주지 않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케냐 현지 공항 입국 시 B씨가 제지를 당하자 지사장은 “B씨는 젊으니 괜찮다”고 둘러대며 공항 직원들과 실랑이 끝에 무리하게 입국했다. 지사장은 일과 중일 때나 휴일, 심지어 출장 중에도 지사장과 퇴직한 회사 간부들의 개인 사업 업무를 수시로 맡기고, 성과가 좋지 않으면 질책했다.

B씨의 선배는 2년이 넘게 매일같이 폭언과 괴롭힘에 시달리다 근무 중 쓰러져 건강 악화로 고통받다 퇴사했다. 결국 B씨도 극심한 스트레스로 악몽과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앓게 됐다. 하지만 지사장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꾀병이라고 조롱하며 퇴사하라고 했다. B씨는 극심한 모욕감으로 그 자리에서 심한 공황장애 발작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 갔고, 네덜란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장기간 약물 치료를 받아왔다.

B씨가 폭언과 갑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지사장은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에서 배운 방식이며, 한국 군대식 스타일일 뿐이라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그가 본사 내부에 마련된 부당행위 신고 창구에 여러 차례 제보를 했지만, 지사장은 본사에 제보를 한 것이 법적 고발과 해고의 사유가 된다고 협박하면서 자진 퇴사를 요구했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협박했다. B씨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한인회 홈페이지에 올라 한인 사회에서 화제가 되었다. 지사장은 B씨와 그의 가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또한 B씨가 회사의 기물을 반납하지 않고 퇴사해 회사 기밀을 유출할 위험이 있다는 명목으로도 고소했다. 최근 네덜란드 법원은 두 건 모두 B씨의 손을 들어줬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직장갑질119는 29일 “한국이 직장갑질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며 이 같은 직장 내 괴롭힘을 공개했다. 단체 관계자는 “해외 공관·지사는 공관장과 지사장이 왕처럼 군림하고 있고, 현지 성매매 업소를 알아보라는 상사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인사회가 좁아 그만두게 되면 다른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신고하기 어렵다”며 “해외 지사에서 괴롭힘을 당할 경우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괴롭힘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가장 먼저 해외 공관의 행정직원, 관저 요리사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해 대사 부부와 가족이 멀리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갑질을 하고 있지 않나 찾아내 엄벌해야 한다”며 “해외지사의 갑질을 신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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