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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안치된 쇼팽 심장, 2014년 다시 꺼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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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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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의 기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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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은 어릴 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곧 죽을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 16세에 리세움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진학문제로 고심했던 것 같다. 그는 인문계인 바르샤바대학 대신 바르샤바 음악원을 선택했다. 그는 친구에게 ‘의사가 걷는 운동을 가능한 많이 하라고 했는데 하루에 6시간씩 책상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습다’며 음악원 선택의 한 이유를 전했다.

당시 결핵은 비교적 흔한 병이었지만 치료는 어려웠다. 쇼팽 일행이 마요르카 섬에 머물 때, 그들 중에 결핵 환자가 있다는 것을 안 섬 주민들은 그들을 멀리했다. 전염병이면서 치료가 어려웠던 결핵은 법정관리 질병이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결핵 환자로서 쇼팽만큼 오래 산 경우는 흔치 않았다.

마요르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노앙으로 돌아왔을 때 상드의 친구였던 의사 파페는 쇼팽을 진찰했다. 그리고는 그의 폐가 건강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쇼팽의 친구이면서 의사였던 마투진스키는 그러한 진단을 믿지 않았다. 그는 쇼팽의 병이 결핵이라고 확신했고 쇼팽의 삶이 길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쇼팽이 사망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20세에 고국을 떠났던 쇼팽은 한번 고향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타지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예감은 맞았다. 고향을 떠난 그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타향인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한순간도 고향을 잊지 못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누나 루드비카에게 부탁했다. “러시아 총독이 내 육신 전체를 바르샤바로 가져가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 심장만이라도 가져가 줘.” 쇼팽이 세상을 떠나고 부검이 이루어졌는데, 그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적출된 그의 심장은 코냑이 담겨있는 크리스털 병에 넣어졌다. 당시 코냑은 보존제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의 육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을 치른 후 루드비카는 심장이 담긴 병을 바르샤바로 가져갔다. 병은 나무상자에 넣어져서 옮겨졌는데, 국경을 지날 때 경비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루드비카는 그 나무상자를 치마 밑에 숨겨야 했다. 얼마 동안 그의 심장은 그녀의 집에 보관되었다.

시간이 지난 후 심장은 근처에 있던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졌다. 처음 교구 신부님은 쇼팽의 심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쇼팽이 파리에 있는 동안, 말썽 많은 조르주 상드와의 스캔들은 바르샤바에까지 알려졌었다. 교구 신부님은 쇼팽의 신앙심을 확신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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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중 파괴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전쟁이 끝난 후 성당은 재건되었고 쇼팽의 심장은 다시 성당안에 안치되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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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부친을 잘 알았던 주교님이 개입했고 그의 심장은 성당의 지하에 안치되었다. 이 때문에 1863년 러시아군이 쇼팽 가족의 집에 난입하여 온갖 유물을 파괴했을 때 심장은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1880년에 와서 쇼팽의 심장은 적절한 대우를 받았다. 대리석 묘비가 만들어졌고, 국가적 기념 의식 속에 성당의 중앙 기둥에 안치되었다.

2차세계대전 중 바르샤바는 크게 파괴되었다. 특히 1944년 나치 독일에 항거하는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을 때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던 성당의 피해는 컸다. 2차세계대전과 그 봉기 중에 심장이 피해를 입지 않고 온존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것은 어떤 독일 장교 때문이었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나치 독일의 무자비한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그 독일 장교는 성당을 방문했다. 그는 쇼팽의 심장이 담긴 함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음악애호가라고 밝힌 그는 그것이 폴란드의 국가적 유물이고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독일군 장교는 그 함을 바르샤바 밖에 있는 한 대주교 교구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봉기 진압작전이 집행되었다. 나치 독일은 무자비 했다. 진압 작전에 바르샤바 시민 20만명이 학살되었고 바르샤바 건물의 약 85%가 파괴되었다. 성 십자가 성당의 잔해는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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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중 폴란드 주둔 나치 친위대 사령관 바흐-젤레프스키. 1944년. 그의 노력으로 2차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쇼팽의 심장을 구할 수 있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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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심장을 구한 그 나치 장교는 바흐-젤레프스키(Bach-Zelewski) 장군이었다. 전(前) 프러시아 출신의 그는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SS)사령관으로서 야만적인 봉기진압과 바르샤바 파괴를 지휘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압 작전으로 나치 독일에서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선조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 그는 옥살이 중 사망했다. 그의 따뜻한 폴란드 피는 쇼팽의 심장을 구하게 했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폴란드 피는 동포를 학살하고 바르샤바의 건물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따르게 했다. 전쟁이 끝나고 쇼팽의 심장은 거창한 의식과 함께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으로 돌아왔다. 쇼팽의 심장은 폴란드의 소중한 유물로 다시 확인되었다.

쇼팽의 병이 결핵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쇼팽의 주치의였고, 사후 부검를 집행했던 크뤼베이예르 박사는 그의 폐가 예상보다 깨끗했고 오히려 심장이 더 상해있다고 부검보고서에 썼다. 오늘날 그 보고서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의학자들은 그 내용을 잊지 못했다.

그 보고서는 쇼팽이 폐에 관련된 병이라기 보다 심장의 병 때문에 사망했을 수 있다는 추론을 낳았다. 시간이 흐르며 의학지식은 발전했고 더 세밀한 병의 진단이 가능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에 기초하여 그의 죽음의 원인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의학자들은 쇼팽의 사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싶어했다.

분분한 여러 말들을 잠재우려면 보관된 심장을 꺼내서 분석해보는 것이 가장 확실했다. 그러나 의학자들의 요구에 성당은 응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밀봉된 병을 열면 보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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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쇼팽의 심장을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하기 위해 옮기는 장면. 신문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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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끈질긴 의학자들의 요구에 성당은 보관된 병을 공개하였다. 그 병을 여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고 다만 그 병을 전문가들 앞에 내어 놓고 관찰, 분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의학자들은 육안과 고해상도의 사진으로 심장을 분석하였다. 쇼팽의 심장은 보통의 심장보다 컸다. 흰색으로 비교적 깨끗했고 보존 상태는 양호했다.

분석결과는 2017년 11월 ‘전미 의학 학술지(the American Journal of Medicine)’에 실렸다. 이것은 쇼팽의 병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오랜 논쟁에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결론은 심낭염이 그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막에 염증이 생긴 것으로 결핵 때문에 생겨 날 수 있는 병 중의 하나이다. 이 병은 숨쉴 때마다 가슴에 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심장의 박동을 어렵게 만든다. 쇼팽이 살던 19세기에 심낭염을 진단할 수 있는 의료기술은 없었다. 결핵 조차도 1950년대에 와서야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다.

쇼팽의 심장이 보존된 병은, 분석의 보고서와 함께 함 속에 다시 넣어졌고 50년 후의 재분석을 기약했다. 다음 편은 쇼팽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쇼팽이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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