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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해킹 불가능한 미래의 통신망… 세계는 '양자 기술' 패권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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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현지 시각) 핀란드 헬싱키 파시토르니 회관에서 열린 '유럽 퀀텀(Quantum·양자) 플래그십' 콘퍼런스 행사장. 스산하고 인적도 드문 헬싱키의 다른 거리와 달리, 이곳은 유럽 각국에서 몰려든 과학자 200~300명으로 북적였다. 퀀텀 플래그십은 유럽연합(EU)이 10년간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를 쏟아부어 스위스 제네바·독일 베를린·스페인 마드리드 등 유럽 주요 지역에 양자 암호 통신망을 구축·운영하고, 양자 컴퓨터, 양자 센서 같은 미래 기술을 개발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이를 통해 미국·중국을 제치고 유럽이 양자 기술 분야를 선도하겠다는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대학,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은 물론이고, 독일 도이치텔레콤과 프랑스 오렌지, 스페인 텔레포니카 같은 통신 회사 등에서 5000여 명의 유럽 양자 연구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총망라됐다. 이곳에서 만난 한 과학자는 "양자를 연구하는 세계 상위 1%의 과학자들이 다 모였다"며 "양자 기술만큼은 유럽이 미국이나 중국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비즈

17일(현지 시각) 핀란드 헬싱키 파시토르니 회관에서 열린 'EU 퀀텀(양자) 플래그십' 콘퍼런스 현장. 유럽의 양자 기술 개발 현황과 미래 전략을 발표하는 이 자리에는 세계 200여 명의 양자 관련 학계·산업계·정부 기관 관계자들이 모였다. /SK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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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연구·개발 프로젝트에는 SK텔레콤의 자(子)회사인 IDQ가 참여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양자 통신칩·시스템을 공급하는 핵심 멤버다. 이 회사는 양자 물리학을 활용해 해킹 불가능한 '5G(5세대 이동통신) 통신 암호 장비'를 개발했다. 또 이 회사는 유럽 주요 지역에 약 1400㎞ 구간에 양자 암호 통신 시험망을 구축하기로 했다. 일본 도시바가 경쟁자지만, 도시바의 기술은 아직 2년 정도 뒤처진 프로토타입(시험판) 수준이다. SK텔레콤은 작년 IDQ를 인수함으로써 단숨에 양자 기술 분야의 세계 선두 기업으로 치고 올라왔다.

양자 패권 위해 兆 단위 투자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 통신 등 양자 기술 시장은 오는 2035년 20억달러(약 2조3600억원), 2050년 2600억달러(약 307조원)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기존 컴퓨터와 통신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을 기술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구글이 현존하는 수퍼컴퓨터로 1만년 걸리는 수학 문제를 양자 컴퓨터로 3분 20초 만에 푸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양자 우월성(Quantum supremacy)'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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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컴퓨터는 원자 단위 이하의 초미시 세계에서만 나타나는 양자 물리학을 이용한다. 고전 물리학에선 어떤 대상이나 물질은 항상 하나의 상태다. 하지만 양자 물리학은 "물질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것처럼 초미시 세계의 현상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중첩(重疊) 가능한 상태로 다룬다. 덕분에 기존 컴퓨터는 전자의 유무(有無)에 따라 0 아니면 1의 값을 갖는 비트(bit) 단위로 정보를 계산하지만, 양자 컴퓨터는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큐비트(qubit) 단위를 이용, 0일 때와 1일 때의 두 가지 경우를 함께 처리해 계산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진다.

유럽은 퀀텀 플래그십을 통해 미래 산업의 지형을 바꿀 '2차 양자 혁명'을 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유럽은 20세기 초 막스 보른과 닐슨 보어 등 양자 물리학의 이론을 정립한 숱한 석학을 배출하면서 '1차 양자 혁명'을 이끌었다. 이제 이를 실생활에 적용해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 양자 수퍼컴퓨터, 양자 암호에 기반을 둔 5G(5세대 이동통신) 등 미래 기술의 상업화로 결실을 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미국과 중국에 추월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미국은 구글, IBM 등 자국 테크 기업을 통해 이미 양자 컴퓨터 기술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5년간 12억달러(약 1조4000억원)를 양자 기술에 투자하는 '국가 양자 이니셔티브 법(National Quantum Initiative Act)'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백악관에는 양자 정책을 조언하는 자문위원회도 신설했다.

중국은 2020년까지 100억달러(약 11조8000억원)를 투자해 안후이성에 양자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 계획이다. 중국은 앞서 2017년 10월 베이징~상하이에 세계 최장 2000㎞ 구간 양자 암호 통신망을 구축했다. 2016년 8월에는 세계 최초로 양자 위성 '모쯔(墨子·묵자)'를 우주 궤도에 쏘아 올리기도 했다.

SKT, 양자 암호 분야 세계 선두

한국 정부는 올해 초 양자 컴퓨팅 핵심 기술 개발에 5년간 445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양자 패권 경쟁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5~6년 전만 해도 유럽의 각종 리포트에 경쟁국으로 등장했지만, 이번 행사의 기조연설자인 카릴 로하나 EU 집행관은 '미국·중국·캐나다·일본'만을 언급했다.

이 분야에 끈질기게 도전한 국내 대기업으로는 SK텔레콤이 거의 유일하다. SK텔레콤은 연구팀의 양자 연구를 지원하다가 2011년에 양자기술연구소(퀀텀 테크랩)를 설립했다.

SK텔레콤은 양자 기술 중에서도 양자 통신 암호 분야의 선두다. 지난해 이 분야의 세계 1위인 스위스 IDQ사를 인수하며 위상이 급상승했다. SK텔레콤은 올 6월 IDQ와 함께 국내에 362㎞의 시험통신망에 양자 암호 기술뿐 아니라, 올 상반기 LTE와 5G 가입자 인증 서버에 IDQ의 '양자난수생성기'를 적용했다. IDQ는 내년까지 진행하는 미국 '워싱턴~뉴욕~보스턴'간 800㎞의 양자 암호 통신망 구축을 맡고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양자 암호 분야만큼은 세계 1위로 치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수퍼컴 1만년 걸릴 문제, 양자컴은 3분에 끝… 양자암호는 난공불락]


오늘날의 컴퓨터는 정보를 '0'과 '1'만으로 이뤄진 이진법으로 처리한다. 한 자리 수에 각각 0 또는 1 중 하나가 들어가는데 이를 비트(Bit·binary digit)라고 한다. 컴퓨터는 이 비트 단위로 데이터를 차례로 처리·계산하며, 이 비트로 구성된 데이터가 커질수록 계산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난다.

반면 양자 컴퓨터는 큐비트(Qubit· Quantum bit)라는 단위를 이용해 데이터를 처리한다. 이론상 큐비트 300개가 있으면, 2의 300제곱에 달하는 경우의 수를 단번에 계산할 수 있다. 이는 우주의 모든 원자 수보다 많은 숫자다. 양자 컴퓨터는 이처럼 획기적인 연산 능력을 바탕으로 수퍼컴퓨터로도 버거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도 쉽게 파악·재현할 수 있게 해 다양한 난치병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게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반대로 오늘날 디지털 통신의 암호 체계와 블록체인의 보안성을 완전히 무력화할 위험성도 있다. 현재의 암호 체계는 엄청나게 큰 소수가 어떤 두 소수(키 값)의 곱셈으로 이뤄졌는지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산해 내려면 막대한 양의 소인수분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빠른 수퍼컴퓨터로도 수십 년이 걸린다. 결국 중간에 해커가 정보를 빼가도 암호를 못 풀어 정보를 탈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양자 컴퓨터는 이렇게 수십 년이 걸릴 계산을 불과 몇 분 만에 해낼 수 있다. 해커 손에 양자 컴퓨터가 들어가면 풀지 못할 암호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양자 컴퓨터는 미래의 핵무기"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양자 암호 기술이다. 양자 암호로 암호화된 데이터는 키 값을 모르면 풀 수가 없다. 따라서 암호 키를 중간에 훔치는 것만이 유일한 해킹 방식이다. 하지만 양자 암호의 키 값은 별도의 양자 전송망을 통해 주고받는다. 양자를 통해 주고받는 이 키 값은 받는 쪽에서 확인하기 전에는 0일 수도, 1일 수도 있는 기묘한 상태가 된다. 만약 해커가 중간에 신호를 가로채려고 하면, 양자 암호 키 값은 고정 값으로 확정되고, 곧바로 해킹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통보된다.

곽승환 IDQ 부사장은 "양자 암호 통신은 송신자와 수신자 간에 비눗방울을 주고받는 것과 같다"면서 "누군가 해킹을 시도해도 흔적이 남고 데이터 자체가 변형되므로 양자 컴퓨터 시대에도 안전한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다"고 했다.



헬싱키(핀란드)=성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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