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GATHERING’전
유대와 연대, 공동체에 대한 주제로 ‘모임-GATHERING’ 전시회를 열고 있는 미디어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 박찬경을 지난달 3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났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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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후쿠시마 원전 폭발 같은 재난이 일상화되고, 넷플릭스의 카테고리처럼 ‘현실붕괴’의 시대입니다. 모임과 유대나 연대, 나아가 공동체를 상상하기 힘든 이 시대에 예술은, 미술가는, 미술관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중진작가 박찬경(54)은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 마련한 작품전 ‘모임-GATHERING’이 이 같은 질문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박 작가는 영상과 사진·설치·영화와 전시기획·비평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형인 박찬욱 감독과 협업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배척·소외시킨 것들, 분단 등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통해 국내외 주목을 받았다. 이번 ‘모임’전은 해마다 중진작가를 선정,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로 마련돼 9점(신작 8점)을 선보이고 있다.
박찬경의 설치작품 ‘해인(海印)’ 전시 전경(위 사진). 박찬경의 사진작품 ‘모임’과 설치 ‘맨발’ 전시 전경(아래). 사진 홍철기·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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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은 기존 미술사·미술관에 비판적 시각을 담은 이미지 설치 ‘작은 미술관’으로 시작된다. 이어 불교 개념인 해인(海印)을 16개의 시멘트판으로 해석한 ‘해인’, 일본 작가와 협업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담은 사진과 오토래디오그래피(방사성물질 분포를 사진으로 나타내는 기법)로 보여주는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 55분에 이르는 흑백 네거티브 영상 ‘늦게 온 보살’ 등이 있다. 또 부처의 일생을 8개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의 마지막 그림인 쌍림열반도 등장 동물들을 촬영한 사진 ‘모임’, 불교의 곽시쌍부(槨示雙趺) 설화를 기계장치로 형상화한 ‘맨발’이 이어진다. 전시 마지막은 이번 전시장인 제5전시실을 축소한 건축모형과 7개의 징으로 북두칠성을 표현한 설치 ‘5전시실’이다.
작품들은 이전처럼 매우 은유적이고 의미 또한 중층적이다. 인문학적 조사·연구를 기반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응축시켜 보이는 대로 쉽게 감상할 수도 있지만 세심히 파고들어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도 있다. 9개 작품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작품과 작품 간의 관계, 작품 내 구성요소들을 살펴보면 모두 모임, 유대 등으로 얽히고설켰다. 작가는 “어떤 간절한 염원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모임의 매개로 중요하다”며 “특히 ‘작은 미술관’에 내건 이응노의 ‘군상’은 인간사회의 유토피아적 공동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늦게 온 보살’ ‘모임’ ‘맨발’ 등도 부처의 열반을 계기로 한 모임·제의이지만 부처 대신 누군가의 죽음·재난 등으로 대체, 의미를 확장시킬 수 있다. “서구적 근대화 속에서 우리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인 죽음을, 모임을 가능케 하는 제의를 배척했어요. 이는 죽음이나 재난, 제의(모임)가 또 다른 국면, 새로운 사회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상상력을 지워버린 꼴이죠.”
박 작가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위기의 하나는 모임, 유대가 희박해져 ‘군상’이 보여주는 이상적 공동체 모습이 사라진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과 미술관은 모임과 유대,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한다. “모임이나 유대는 세월호 참사 같은 재난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유대, 이데올로기적 유대 등도 의미 있지만, 곽시쌍부 설화처럼 열반한 부처가 제자 가섭이 오자 두 발을 살짝 관 밖으로 내미는 자그마한 상징적 행위로도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어쩌면 이번 전시를 통해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저서 <도래하는 공동체>에서 탐색한 공동체, 그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태도를 모색하는 듯도 하다.
‘모임’전은 묵직한 주제와는 또 다르게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측면을 작가의 시각·예술적 미감으로 시각화해서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는 재난이 얼마나 비실재적·비가시적일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역설과 아이러니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민예품을 치켜세운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 사진(‘작은 미술관’)이나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동물들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모습(‘모임’) 등에서도 엿보인다. 시멘트판에 파도를 새겨 ‘시멘트 바다’인 ‘해인’은 유동적인 바다(물)와 딱딱한 시멘트의 모순된 속성을 통해 가짜뉴스 등 “이미지와 데이터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세태”를 성찰하게 한다.
전시장 구조나 작품 배치 등에서도 작가의 치밀한 개입이 나타난다. ‘작은 미술관’은 위압적인 기존 미술관과 달리 낮은 벽, 뚫어진 창문, 공간들의 연결을 통해 교감·소통을 강조한다. 전시장 전체가 회랑(‘작은 미술관’), 들마루가 있는 너른 마당(‘해인’), 여러 건물들(영상 상영실) 등 넓은 집(가상의 공간)을 형상화한 듯하다. 전시장에서는 8일부터 매주 강연과 토론이 열린다. 작가가 ‘모임’전을 통해 미술관을 사람들의 모임이 이뤄지는 특별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전시는 내년 2월23일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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