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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면서 물길을 열고 하늘을 가로지른다.
40년 동안 바늘(needle)로 동판을 긁고 부식시켰던 동판화 대가 강승희 작가(59)가 붓을 들었다. 5년전부터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바르고 쌓는 화가로 변신했다. 50대 중반에 작업 방향을 바꾸는 게 쉬웠을까.
서울 노화랑 개인전에서 만난 작가는 "처음 시작할 때 그림이 안 풀리고 답답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수없이 캔버스를 찢고 불태운 끝에 나 만의 기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수많은 점을 찍어 건물이 빼곡한 도시 풍경을 만들고, 푸른색과 흰색 물감을 겹겹이 발라서 새벽 공기를 그렸다. 붓을 쓰면서도 판화 도구를 버리지는 않았다. 물감을 밀어내는 스크래퍼(scraper)와 바늘, 동판을 닦는 망사를 사용해 '동판화 느낌이 나는 유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원래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해 밑바탕도 있었다. 부전공인 판화로 각종 미술대회 수상을 휩쓸면서 추계예술대학 판화과 교수가 됐다.
"동판화로 얻은 명성을 떨쳐 버리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거친 동판화 작업이 힘에 부쳤고 예전에 그렸던 회화가 그리워 도전장을 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회화와 조각, 미디어아트를 넘나들더라."
새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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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로 옮기면서 화폭도 커졌다. 예전에는 동판화를 찍는 프레스 기계 제한으로 '60×90cm'(40호)보다 큰 작품을 제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100호, 200호 대형 화면에 자유자재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됐다. 김포시 논두렁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5년간 갈고닦은 그림 40여점을 전시장에 걸었다.
작업 도구는 바뀌었지만 40년 가까이 지속해온 '새벽' 연작은 계속됐다. 틈만 나면 차를 몰고 다니면서 바라본 전국 곳곳의 동틀녘 풍경을 서정적으로 풀어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푸른 바다 빛깔이 두드러진다.
작가는 "아득한 새소리, 물소리, 새벽 공기를 좋아한다. 중국 장가게 암벽을 보고 놀라지만 돌아오면 잔상이 없는데 우리나라 풍경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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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시리즈는 외로운 서울살이에서 비롯됐다. 대학시절 자취를 할 때 고향이 너무 그리우면 오전 5시30분에 달렸다. 작가는 "그 때 본 서울 빌딩숲이 한라산 같아서 너무 아름다웠다. 한 폭 동양화 같은 감흥을 동판에 새겼다"고 했다.
전시작 중에 텅빈 그네가 마음을 움직였다. 누군가 그네를 툭 건드린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막 하늘로 비상하려는듯도 하다. 작가는 "흔들리는 인생일 수도 있고, 유년 시절 추억을 끄집어내는 장치일 수도 있고, 높이 도약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할 수도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놨다. 전시는 20일까지.
[전지현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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