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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슈 미술의 세계

무한한 가치의 숫자 0…경매 틀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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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0원에서 시작하는 `제로 베이스` 온라인 경매에 참가한 이언정, 함미나, 김완진, 김상현, 장은우, 정다운 작가(왼쪽부터)가 대표작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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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시작가는 0원.'

개성과 패기, 열정을 작품에 담아온 젊은 작가 6명이 지금까지 없었던 미술 경매 시장에 도전한다. 서울옥션이 경매 문턱을 낮추기 위해 처음 마련한 파격적인 온라인 경매 '제로 베이스(Zero Base)'에 작품을 출품한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 시작가를 수천만 원에서 수십억 원대로 정해놓고 낙찰자를 찾던 기존 경매 형식이 아니라 고객이 0원에서부터 작품 가치를 결정한다. 0은 새로운 시작점이자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숫자다. 경합 여부에 따라 낙찰가는 예상가의 100배 이상 형성될 수 있는 구조다.

오는 15일 서울옥션 홈페이지에서 '제로 베이스' 출품작의 운명이 결정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어서 두렵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어 설렌다.

지난 8일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만난 작가 김상현(39) 김완진(38) 이언정(32) 장은우(40) 정다운(32) 함미나(32)의 표정에선 기대감이 걱정을 압도했다. 이들은 "경매는 처음이라서 작품 가격이 얼마에 결정될지 궁금하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작품을 노출할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업작가 10만명 중 0.1%만 작품을 파는 미술 시장에서 이들의 도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 미술 시장은 경기 침체와 정부의 과세 강화로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형국이다.

최윤석 서울옥션 상무는 "미술 시장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재테크 목적뿐만 아니라 취미로 그림을 사는 문화를 만들어여 한다"며 "좀 더 다양한 작가를 소개하고 좀 더 많은 소비자를 경매에 진입시키기 위해 제로 베이스 경매를 시작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에 참가한 젊은 작가 6명은 서울옥션 전문가들이 각종 갤러리와 아트페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발굴했다. 7~15일까지 열리는 프리뷰 전시장에서 재기발랄하면서도 진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현 작가는 'Thank You(감사합니다)'가 인쇄된 슈퍼마켓 비닐봉지 등을 액자에 넣어 가치의 전복을 시도한 작품 11점을 출품했다. 거대 기업 로고도 비닐봉지에 인쇄되면 하찮게 느껴지지만, 우아한 액자에 넣으면 뭔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김 작가는 "물건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그 가치를 잘 모르는 비닐봉지의 기능적인 상징성은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서울대 조소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그는 무엇을 만드는 데 흥미를 잃어 2007년부터 비닐과 액자 조합을 작업하고 있다.

김완진 작가는 인체 누드 일부로 결핍과 갈망을 표현한 작품 12점을 선보인다. 색연필과 유화 파스텔로 맨살의 온도를 섬세하게 그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작가는 "3년 전 유화 물감에 질려서 내가 즐겁게 작업할 재료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언정 작가가 상상한 도시 풍경 판화 13점도 인상적이다.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한 그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에 존재할 법한 건물들을 구성하는 게 매력적이다. 부정적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이고 재미있는 요소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은우 작가는 남루한 건물을 그린 종이를 덧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완성한 입체적인 도시 풍경화 10점을 출품한다. 동덕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도시는 감성의 공간이다. 힘들 때 산책을 많이 하는 데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골목과 건물을 자주 만난다. 추억의 공간, 의미 있는 도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다운 작가는 다양한 천(패브릭)을 팽팽하게 당겨서 기하학적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 14점을 선보인다. 동덕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2014년부터 물감 대신 천으로 그림을 그리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는 "패브릭 드로링, 회화의 확장"이라고 표현했다.

함미나 작가는 유년 시절 상처를 담은 회화 15점을 펼쳤다. 세 살 때 살던 강원도 동해시에서 유괴돼서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앵벌이를 하다가 택시기사의 신고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림 속 흐릿한 형체는 울면서 바라본 대상이다. 계원조형예술대에서 공간연출학을 공부한 작가는 "어릴 때 헐벗은 채 동네를 누벼 '부시맨'으로 불렸던 또래 남자아이를 그리면서 상처를 치유한다"고 했다.

프리뷰 전시는 무료.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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