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시대藝인] 김환기는 놓쳤으나 남관은 붙든 것…파리발 '푸른 추상'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현대화랑 '남관의 추상회화 1955∼1990' 전

프랑스가 먼저 알아본 '추상회화 선구자'

파리선 인정했으나…김환기 비해 저평가

서양유물에 동양사색 접목…"동서 융화"

콜라주·데콜라주 등 실험정신·기법 탁월

이데일리

남관의 ‘푸른 공간 2’(1966). ‘파리시대’에 그린 푸른 배경의 작품. 가운데 배치한 사각형상은 그 시절 관심을 기울였다는 고대 유물·유적의 잔재로 보인다. ‘푸른 추상’은 이후 1969년부터 시작한 ‘서울시대’에서 본격화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애잔한 푸름이 보인다. 깊은 바다인 듯도 하고, 높은 하늘인 듯도 하다. 고요하지만 역동적이고, 흩어졌으나 빨려들 듯한. 그 푸름에 묻어둔 별별 형상은 또 어떤가. 한자 이전의 상형문자를 옮긴 듯도 하고, 신라시대 왕들이 썼다는 관의 모양도 얼핏 스친다. 아니 그보단 눈이 먼저다. 동그랗고 네모난 눈. 그 시대에 그럴 리 없겠지만 로봇의 심장을, 정말 아니라면 사람의 마음을 대신 들여다보게 했다 할 눈동자가 프레임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시선을 돌리면 비단 푸름만도 아니다. 벗겨진 듯 녹이 슨 듯 첩첩이 내려앉은 황색의 더께도 있다. 이미 허물어졌으니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건가. 엉겨붙은 흔적 뒤로 무거운 철빛만 남겼다.

아마도 작가는 이들 버거운 형체를 위해 이렇게 말한 걸 거다. “시간이 거듭할수록 하나의 형태, 마치 나의 자화상처럼 또 하나의 내가 형성된다. 코도 눈도 입도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은 일그러진 상, 동양의 옛 고적에 새겨진 이끼에 덮인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내 머리를 꽉 채운다”(‘화랑’ 1979).



이 모두는 남관(1911∼1990)의 붓끝이 빚은 세상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이 꾸린 기획전 ‘남관의 추상회화 1955∼1990’에 들었다. 전시는 현대화랑이 24년 만에 다시 마련한 회고전 형식이다. 1972년 갤러리현대서 처음 연 추상회화 전으로 남관을 소개했던 현대화랑은 1995년 남관 타계 후 5주기 전으로 그를 추모했더랬다. 내년 50주년을 앞뒀다는 화랑이 가장 먼저 떠올린 작가란 뜻도 된다. 잠시 소원했더라도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작가로 말이다.

그런 만큼 전시는 가히 미술관 급이다. 흔히 문자추상 정도로만 알던 남관의 작품세계에 대한 ‘고정관념 파기’를 요구하는데. 양과 질, 뭘로도 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1955년은 남관이 마흔넷이란 늦은 나이에 프랑스 파리행을 감행했던 해. 1990년은 그가 타계한 해다. 결국 전시는 작가인생의 알맹이를 다 아우르겠다는 의지인데. 그에 걸맞게 60여점을 건다. 개막에 맞춘 38점을 수시로 교체해가며 가능한 한 풍성하게 소개하겠다고 했다.

이데일리

1976년 화실에서 작업 중인 남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의 ‘남관의 추상회화 1955∼1990’ 전에 나온 벽장식 사진을 다시 촬영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유럽문명 보며 그리워진 동양적 사색”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란 평가를 받는 작가. 그런데 말이다. 추상이란 게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 아닌가. 알 수 없는 선과 면, 그 위를 덮는 엉킨 색이, 구상 일색이던 한국화단에 먹힐 리가 없었다. 그 시절 추상회화를 하겠다고 길을 떠났던 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남관과 김환기(1913∼1974)다.

두 사람이 접점을 이룬 곳이 프랑스 파리. 어차피 한국에선 안 되는 꿈을 위에 파리로 향했던 건데. 남관의 1955년(그는 광복 후 가장 먼저 파리서 활동한 작가로 알려졌다)에 이어 김환기가 이듬해에 파리행을 택했다. 성과는 갈렸다. 3년여를 보낸 김환기가 파리에서의 도전을 완성하지 못한 채 1963년 다시 날아간 미국 뉴욕에서 비로소 추상의 꿈을 완결했던 데 비해 남관은 1968년까지 파리에 머물며 ‘작가로서의 성공’을 맛봤다.

이데일리

남관의 ‘자색에 비친 고적’(1964)와 ‘중세의 뜰’(1967). ‘파리시대’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고대 유물·유적의 잔재를 옮겼다. ‘자색…’은 그 시절 즐겨 쓴 황색으로, ‘중세…’는 이후 본격화할 푸른색으로 중심을 잡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59년 김환기가 불현듯 파리를 떠나면서 남관에게 남긴 한 마디가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한다. 몽파르나스 뒤 어두운 창고 같은 남관의 화실을 찾은 김환기가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했다던. 이 에피소드는 1974년 김환기가 뉴욕서 타계한 직후 남관이 쓴 ‘김환기 형의 영전에’(‘동아일보’ 1974)에서 공개됐다. 이미 한국에 돌아와 있던 남관은 김환기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과 더불어 “서울에 주저앉아 있는 게 형에게 부끄럽다”는 심정까지 토로했다.

그럼에도 남관은 ‘파리시대’서 뜻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동양과 서양을 융화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1년여 만에 파리시립미술관이 기획한 ‘현대국제조형예술전’(1956)에, 1958년에는 피카소·마티스 등 당대 파리화단을 이끈 전위적 예술모임인 ‘살롱 드 메’에 한국인 최초로 초대받는 영예를 얻었다. 이 단체전에는 1959·1961·1964·1965년에 연이어 참여했고, 이때 출품한 ‘동양의 풍경’(1961), ‘허물어진 제단’(1962)은 각각 파리국립현대미술관과 파리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데일리

남관의 ‘동양의 제’(1963). 벗겨진 듯 녹이 슨 듯 첩첩이 내려앉은 황색의 더께가 보인다. 유럽에서 비로소 일깨웠다는 동양적인 사색이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파리시대, 남관의 관심은 고대 유물이나 유적지로 향했던 듯하다. 비바람에 깎이고 때가 앉은 세월이 자주 보인다. 이번 전시에 건 ‘동양의 제’(1963), ‘허물어진 사적’(1961), ‘자색에 비친 고적’(1964). ‘동양의 환상’(1966) 등에서 보이는 그것. 이즈음을 두고 남관은 “유럽문명 속에서 오래 살다보니 날이 갈수록 그리워지는 것은 동양적인 사색과 낡은 공간에의 애정”(‘경향신문’ 1968)이라 회고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해군종군화가단에서 활동했던 경험도 얼핏 비치는데. “내 그림의 모티브는 자주 전쟁의 기억에서 온다”(‘조선일보’ 1973)고 했던 말과 무관치 않다. ‘피난민’(1957)이 그중 한 점. 뭉뚱그린 도형 가운에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을 중앙에 배치한 작품은 전시작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을 품었다.

이데일리

남관의 ‘피난민’(1957). ‘남관의 추상회화 1955∼1990’ 전에 나온 작품 중 가장 오래된 작품. 기하학적 도형을 뭉뚱그린 가운데 중앙에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을 드문드문 들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실험정신이 만든 자유…화면에서만 구현

남관의 그 ‘푸름’은 1968년 귀국한 뒤 ‘서울시대’서 본격적으로 빛을 냈다. 홍대서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작업에 그이는 푸른빛을 자주 심어놨는데. 이를 궁금해 한 이들에겐 “파리의 하늘을 상상했다”는 답을 꺼내놓기도 했단다. 참 아이러니한 굴곡이 아니었나. 파리에선 동양의 뿌리를 찾았다는 그가 정작 서울에선 파리의 풍경을 떠올렸다니. 그렇게 그는 ‘푸른 반영’(1974), ‘정과 대화’(1978), ‘고독’(1979), ‘황색의 반영’(1981), ‘삐에로의 꿈’(1984), ‘환영’(1984) 등, 그 특유의 문자·왕관·눈 등이 어우러진 푸른 추상을 이어간다.

이데일리

남관의 ‘환영’(1984). 푸른색을 집중적으로 쓴 ‘서울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마치 목판화 작업인 양 툭툭 불거진 형상이 잡힌다. 작가가 시도한 실험기법 중 하나로 보인다(사진=현대화랑).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남관의 화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실험’이다. 1962년쯤부터란다. 이른바 ‘콜라주와 데콜라주’로 화면에 종이를 잘라붙이거나 또 떼어낸 뒤 물감을 입히고 뿌리고 긁어대는, 또 테라피를 문지른 양 물감이 피해 가도록 하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 기법들이 계속 튀어나온다. 완고한 성격에 타협을 몰랐다는 그가 화면에는 대단히 유연하고 관대하지 않았나. 결국 그 자유로움의 정점은 검은 얼굴들이 찍었다. ‘구각된 상’(1988), ‘반영’(1989) 등. 서로 다른 인종의 검은 얼굴들을 한 캔버스에 나란히 들인, 세상과의 마지막 화해가 아니었을까 하는.

“미술사를 다시 봐야 한다고 할 때 누구를 재조명할 건가.” 전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겠다. 트렌드가 아니란 이유로 저만치 미뤄둔 작가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마는. 그래도 이미 한참은 뒤처진, ‘추상회화 선구자’가 품었던 고민·고뇌를 제대로 들춰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거다. 전시는 30일까지.

이데일리

남관의 ‘구각된 상’(1988). 타계 이태 전 작품이다. 서로 다른 인종의 검은 얼굴들을 한 캔버스에 나란히 들였다. 세상과의 마지막 화해를 시도한 것은 아닐까(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