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20대의 힘 전’ 철거 사건
당시 출품작 15점 전시장에 나와
시민 현장 계몽…선전 활동 내세운
미술동인 ‘두렁’ ‘임술년’ 판화·걸개…
당시 노동자 연대투쟁 장면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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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 형사들이 전시장에서 뜯어내 내동댕이치고 압수해 갔던 작은 패널 그림 하나를 미술관에서 천천히 살펴본다. 무언가를 절박하게 싸안은 남자의 모습을 담은 정정엽 작가의 그림이다. 작가는 그 남자를 누르는 듯한 화폭에 박노해의 시 <사랑>을 그리듯 적어서 메웠다. ‘사랑은/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의 몸부림….’
경기 안산시 경기도미술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시점(時點)·시점(視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을 찾아가면 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던 시국사건인 ‘20대의 힘’전 출품작 15점을 만나게 된다. 한국의 현실참여 미술운동을 일컫는 ‘민중미술’이 공안당국의 발표로 처음 등장했던 ‘힘전 작품 철거사건’은 1985년 7월 일어났다. 서울 북촌 아랍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미술공동체와 미술동인 ‘두렁’ 작가들의 ‘20대의 힘’전 출품작을 종로서 형사들이 불온한 반정부 선전물로 보고 철거해 압수하고 전시를 무산시켰다. 전시장 벽에 붙은 15점의 패널 작품은 당시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 장면을 담은 것들로, <사랑> <바람이 돌더러>란 제목의 박노해 시화 2점이 포함돼 있다.
‘힘전’ 출품작이 처음 공개된 이번 전시는 20여년을 국내 민중미술사 연구에 천착해온 김종길 학예실장이 기획했다. 79~90년 서울 경기·인천·수원 지역에서 활약했던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미술운동 소집단의 작품과 활동 자료들을 포괄한다. 군부정권의 억압으로 험궂었던 80년대, 미술로 저항했던 리얼리즘 대가들의 숨은 작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힘전’ 출품작 못지않은 특별전 내용의 핵심은 82년 노동자·시민의 현장 계몽, 선전 활동을 내세운 미술 동인 ‘두렁’의 판화, 걸개그림과 당대 또 다른 실력파 작가들이 결성한 ‘임술년’의 전시 아카이브 공간이다. 특히 1984년 두렁 동인들이 열림굿판(결성식)을 서울 경인미술관 마당에서 벌일 당시 선보였던 대형 걸개그림 <조선수난민중해원탱>이 김봉준 작가의 붓질로 재창작돼 내걸렸다. 이 그림은 국내 미술현장에 전시된 첫 걸개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임술년 동인의 후반부 활동을 보여주는 공간에서는 황재형, 이종구, 송창 등 지금도 중견작가로 실력을 과시하고 있는 이들의 강렬한 풍경과 인물 연작, 판화 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작가 황재형이 1988년 그린 걸개그림 <성완희 열사 추모도>(일부분·작가 소장)는 그가 걸개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기에 더욱 주목되는 희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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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동인 두렁의 중요한 일꾼이었던 이기연 작가가 찍은 <지게꾼> 등 당대 대중보급용 판화 연작들도 독특한 감흥을 안긴다. 하층민인 지게꾼의 고단하고 거친 삶이 암전된 화면을 배경으로 다가오는 <지게꾼>과 민화 불화의 도상을 모티브로 삼은 여러 채색판화도 눈길을 끈다. 불화의 감로탱화를 모티브로 시작된 걸개그림이 소집단 가는패의 대형 노동자 걸개그림에서 보듯 80년대 후반에는 전투적인 리얼리즘의 구도로 재편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그러나 기승전결이 중요한 대중 전시의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시대적 맥락, 작품성과 내용성을 충분하게 압축해 정리하고 두루 꿰지는 못했다. 수천점에 이르는 80년대 진보 미술운동의 사료와 작품을 맥락을 갖고 재구성했다기보다는 전문가나 당대 참여작가들이 보기에 맞춤한 아카이브 자료실에 가깝다. 새롭게 발굴한 80년대 현장미술의 막대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대중과 그 시대 진보적 참여미술의 의미를 폭넓게 소통할 수 있는 전시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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