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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명예판사는 ‘국민의 이름으로’ 판결하는 독일 사법권 상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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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독일 노동법원 마르틴 드레슬러 판사

한겨레

“법대에 앉으면 저나 명예판사나 모두 같은 판사입니다.” 지난달 11일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노동법원 334호 법정, 마르틴 드레슬러(62) 판사는 법대를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법정을 들어서 120여개의 방청석과 소송 당사자 좌석을 지나면, 1m도 안 되는 거리에 20여㎝ 높이의 법대가 나온다. 재판이 열리면 드레슬러 판사는 명예판사 2명과 함께 이 법대에 앉아 당사자 변론에 귀를 기울인다. 전문 법조인은 재판장뿐이지만 명예판사 2명이 낸 의견은 드레슬러 판사와 같은 무게를 갖는다. 명예판사는 노동사건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담보하는 비직업 법관을 말하는데, 현장에서 축적한 전문 지식을 활용해 노사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노동법원

주내 6개 지방노동법원의 항소심

재판장·노-사 명예판사 2명 함께

“노동사건 전문성·특수성 반영해”


대부분 노·사 합의된 판결 나와

“한국도 노동법원 두려워할 이유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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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연방헌법재판소와 5개(일반·행정·재정·노동·사회)의 분야별 법원을 두고 있다. 노동법원은 그 가운데 하나다. 연방노동법원 아래 주마다 1·2심 노동법원이 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노동법원(이하 주노동법원)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주에 있는 6개 지방노동법원의 항소심을 맡는다. 독일에 설치된 주노동법원 18곳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베를린 지방노동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해 1996년부터 이곳에서 근무한 드레슬러 판사는 현재 재판과 법원 공보 업무를 함께 맡고 있다.

“명예판사는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한 사람들입니다. 한가지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판결을 할 때 아주 근본적으로 여러 시각을 고려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어요.” 지난 9월 한 노동자가 병가를 한달 이상 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사건을 심리했는데, 3명의 판사는 건강 상태, 고용주가 들인 비용, 실제 해고 사례, 해고 사유 정당성 등을 검토했다. 판사가 법리적 관점에서 사건을 검토한다면, 명예판사는 현장에서 길어 올린 지식과 경험을 판단에 반영했다. 민법상 계약 논리만 따지기 쉬운 판결에 노동사건의 특수성이 접목되는 셈이다.

주노동법원은 부당해고·징계·파업·임금 등 노동과 관련된 모든 분쟁을 전담한다. 예컨대 지난해 12월 아이를 출산한 여성 노동자가 2년의 육아휴직을 1년 더 연장하려 했지만 고용주에 의해 거절당한 사건에서 노동법원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입법 취지를 볼 때, 자녀의 세번째 생일까지 육아휴직을 연장하는 데 고용주의 동의가 필요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5월 주노동법원은 마피아 문신을 한 지원자의 채용을 거부한 베를린 경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시민들이 ‘문신한 경찰’을 보고 경찰이 독일의 헌법적 가치에 동의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명예판사는 우리의 민주노총이나 한국경영자총협회 같은 노사 단체의 추천을 거쳐 뽑는다. 임기는 5년이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주노동법원에만 329명의 명예판사가 있다. 30살 이상, 5년 이상의 명예판사 경력을 가진 이들이다. 22개 합의부에 각 8~9명씩의 노사 양쪽 명예판사가 근무하는데, 드레슬러 판사가 속한 17부에는 모두 17명의 명예판사가 돌아가면서 재판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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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당한 노동자는 빨리 새 직장을 구해야 하는지, 고용주는 얼마나 더 월급을 줘야 하는지, 하루라도 빨리 결론을 짓고 싶어해요. 돈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죠.” 현장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니 사건 처리도 신속해졌다. 소송이 제기되면 3~4주 안에 첫 재판을 여는데, 1심의 절반이 3개월 안에 결론 나고 나머지 절반은 6개월 안에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실제 노동법원에서 처리된 사건의 85.8%가 6개월 안에 마무리됐고, 3심까지 소요된 기간은 약 2년이었다(2014년 기준). 독일의 신속한 처리는 한국과 대비된다. 한국의 노동사건 구제기관은 행정기관인 ‘노동위원회’와 ‘법원’으로 이원화돼 있는데,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판단에 불복하면, 법원에서 1·2·3심을 거치게 된다. “사실상 5심제나 다름없어 노동자 권리 구제가 장기화된다”는 노동계 지적이 나온다.

드레슬러 판사는 노동법원이 국민의 사법 참여를 촉진하는 것은 물론 노동 현장에 법률 지식을 전파하는 구실도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판결 선고는 ‘국민의 이름으로’(Im Namen des Volkes)란 문구로 시작한다. 사법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환기하는 의미다. “명예판사는 일하는 국민의 일부입니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법을 전공한 사람만 판결을 하는 게 아니라 노동하는 국민들이 판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명예판사들도 노동사건에서 실제 어떤 식으로 법이 적용되는지 알게 되니까 직장에 돌아가 법원에서 배운 사례나 판례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요. 법원이나 현장이나 서로 ‘윈윈’이죠.”

한국에서도 노동법원 설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2003년 11월 참여정부 시절, 노사관계법·제도선진화연구위원회가 노동사건 구제기관과 절차를 일원화하기 위해 노동법원을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뒤, 18·19·20대 국회에 연이어 노동법원 도입 관련 법률안이 상정됐지만 통과되지는 못했다. 지난 3월 대법원 법원행정처와 공무원노조 법원본부가 ‘노동법원 설치를 위해 상호 노력한다’는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다시 공론화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하지만 재계와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노동법원은 노동자 편향적’이라는 반감도 크다.

“노동자쪽이든 사쪽이든, 명예판사는 자신이 판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올바른 해법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일방적으로 한쪽 편에 서서 편향된 의견을 내는 사례는 거의 없어요. 제 경험상 95% 이상 노사 모두 합의된 결론이 나왔습니다. 노동법원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요.” 드레슬러 판사의 말이다.

베를린/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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