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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김웅의 덧뵈기]쇼를 수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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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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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들의 영웅은 로버트 태권브이와 김일 선수였다. 일제 로봇이 독점하던 때에 혜성처럼 나타난 로버트 태권브이는 곧, 마징가 제트와 싸우면 누가 이길 것인가를 놓고 조무래기들의 주먹다짐도 불사하게 만드는 애국심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마징가 제트 따위는 늦가을 고추잠자리처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신앙 고백하듯 말했지만, 일제 샤프펜슬의 상품성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과학기술의 총합체인 로봇 분야에서 일본을 이긴다는 것이 쉽게 확신되지 않았다. 찝찝한 집단적 정신승리에 불과했다. 그 찜찜함을 일거에 날려주는 것은 역시 프로레슬링이었다. 박치기 한 방으로 산만 한 덩치의 상대방을 일거에 침몰시키던 김일 선수나 표범처럼 날아 적들의 가슴팍에 드롭킥을 내리꽂던 이왕표 선수는 우리 시대의 방탄소년단이자 어벤저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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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늘 같은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경기 초반, 일본 ‘쪽바리’ 선수들은 실력에서 달렸기 때문에 헤드록 같은 기본 기술에도 버둥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싱겁게 끝날 것 같은 경기에는 늘 반전이 있었는데, 경기가 안 풀리면 일본 선수들은 괴춤에서 드라이버나 멍키스패너를 꺼내곤 했다. 분명 신체검사를 마쳤음에도 도대체 어떻게 저런 흉기가 ‘스판빤스’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안되었지만, 그 흉기로 김일 선수 두정부를 깔 때 그것을 방조하는 주심을 보면서 이것이 브레이크 없는 차량 같은 잔인한 음모였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선혈을 쏟고 난 김일 선수는 머리칼을 잃은 삼손처럼 힘을 잃었고, 농약 맞은 개구락지처럼 바닥을 구르곤 했다. 번연히 벌어지는 비극적 역사의 반복 앞에 관중은 그저 환장할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김일 선수가 있었다. 저 정도 피를 흘렸다면 실혈성 쇼크로 사망했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우리의 김일 선수는 기사회생했다. 역사적 소명과 국민들의 준엄한 명령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불의와 민족적 분노가 극에 달할 즈음 김일 선수는 멍키스패너를 휘두르는 일본 선수들을 향해 블록버스터급 박치기를 날리고 핵사이다로 경기를 매조지 지었다. 그 공정과 정의의 승리가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우리는 조금 전까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선혈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스패너에 까인 전두부 열창상이 마치 <엑스맨>의 울버린처럼 순식간에 자연 치유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뿌듯한 ‘국뽕’의 추억은 장영철 선수가 외친 “프로레슬링은 모두 쇼다”라는 말과 함께 대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버렸다. 그 외침은 황우석 박사의 3번 줄기세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자신의 환호와 애정이 거짓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했기 때문에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진실을 외친 대가는 컸다. 장영철 선수는 한순간에 배신자가 되어 대중의 분노를 직면해야 했다.

자신의 선호와 애착이 부정당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된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믿고 싶은 것만 찾고 예정된 결론만을 원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하나 결국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원하는 것만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과 거짓 사이에는 늘 거짓 위로와 흑마법 같은 선동이 끼어든다. 그래서 위로는 거짓이고 진실은 고통스럽다.

대중은 결국 프로레슬링을 수호했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프로레슬링 스타들은 그 오랜 기간 선악대결과 반일감정 같은 진부한 스토리만을 반복했다. 후배들을 키우지 않고 단지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는 불쏘시개로만 활용했다. 자신들만이 스타여야 하기에 새 캐릭터나 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미난 골에 범 나고, 오래 앉으면 새도 살 맞는 법이다. 그 사이 홍수환 선수는 4전5기 끝에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고 챔피언을 먹었고, 대일파스를 등에 바르고 나타난 이만기 장사는 들배지기로 거인들을 넘어뜨렸다. 서릿발 같던 권력의 가피도 사라졌다. 봄이 오면 아침볕만으로도 녹는 것이 서리다. 사기극을 수호했지만 내심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것처럼 꺼림칙했던 대중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스포츠로 갈아탔다.

만약 장영철의 외침이 있었을 때, 프로레슬링이 철저한 훈련이 만들어낸 종합기예라는 사실을 밝혔다면, 간단해 보이는 수플렉스 하나만도 극히 정교하고 환상적인 퍼포먼스라는 사실을 알렸다면, 그랬다면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우월감이 무너지는 것을, 무엇보다 자신들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기에 사실을 부인했다. 그렇지만 동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가듯,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세대는 바뀐다. 마찬가지로 20년간 절대적으로 군림했던, 질식할 것 같은 꼰대세대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아무리 열광했어도 우리는 그 쇼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지금이 아닌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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