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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직설]뭉클한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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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찌개, 깍두기, 장김치 같은 것도 시골 가서는 서울 것 같은 것을 먹을 수 없다. 외국에 간 사람이 자기의 가족보다 서울의 김치깍두기 생각이 더 간절하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경향신문

식민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제23호 ‘경성(京城)명물집’ 꼭지의 한 문장이다. 된장찌개에서 김치깍두기마저 서울식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떡이라면 “서울의 떡 중에 색절편(오색삼색으로 색깔을 낸 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라고 할 만큼 서울 향토색이 그때까지 음식에 남아 있었다. 지역 김치가 떠올라 꺼낸 소리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13일자는, 기본 양념에다 미나리·갓·조기·생굴·청각·생전복·낙지(또는 문어)·배·밤을 써서 담그는 통배추김치 김장을 ‘서울김장’이라고 소개했다. 이보다 한결 간소해진 통배추김치가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대표하는 김치가 되었다고 하겠다.

‘별건곤’에서 언급한 장김치도, 서울식의 경우에는 화려한 김치였다. 장김치는 젓갈이나 소금을 쓰지 않고, 장으로 배추와 무를 절여 담근다. 고명으로는 석이·표고버섯과 밤·배·대추·잣 등을 썼다. 단맛을 돋운다고 당시 최고급 식료인 꿀 또는 설탕을 더하기도 했다. 깍두기는 무가 주연인 김치다. 젓갈은 새우젓 하나를 옅게 쓰는 게 서울식의 핵심이다. 깍두기가 남쪽으로 가면? 젓갈의 풍미가 한층 짙어진다. 남동해안에 이르면 어린 우럭을 무와 함께 버무려 한참 곰삭은 맛을 설계한다. 서울 깍두기가 경쾌하다면 거제, 통영 쪽 깍두기는 깊고 묵직하다. 오로지 지역 특산물 무엇 한 가지를 재료 또는 부재료로 쓰네 마네가 다가 아니다. 기본 양념의 운용, 맛의 설계, 발효와 숙성에 잇닿는 감각의 바탕, 그에 따른 최종 연출이 지역마다 다른 것이다. 배추와 무가 얌전히 갈무리된 데다 산뜻한 국물이 어울린 나박김치도 대표적인 서울김치다. 나박나박 얌전히 모양 잡은 주재료와 고춧가루를 쓰되 고운 붉은 물이 들 정도로만 쓰고, 고운 빛깔이 경쾌한 풍미와 어울려 ‘서울식’을 완성한다.

평안도식 동치미와 백김치도 반갑다. 젓갈이나 곡물 전분을 쓰지 않고 오로지 소금물만으로 담그는 동치미는 그 개운함과 깔끔함이 일품이다. 시원한 맛, 입안과 식도마저 탁 치고 톡 쏘는 맛이 들도록 익는 백김치는 오랫동안 평안도 명물로 인식되었다. 배추의 푸른빛과 흰빛이, 뽀얀 백김치 국물에 어울리도록 익으면 우선 눈으로 먹기에도 즐겁지 아니한가.

함경도는 배추김치를 담글 때에는 평안도에 비해 고춧가루를 넉넉하게 쓴다. 명태, 동태, 대구, 가자미 등을 잘 손질해 배춧잎 사이에 켜켜이 넣기도 했다. 명태에서 가자미에 이르는 생선은 개운한 단맛과 감칠맛을 들이는 열쇠다. 마침 털게까지 잡히면, 잘 찐 털게의 속살을 동태김치에 싸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강원도는 함경도와 바다를 함께하는 곳이다. 더구나 명태라는 자원이 공통이다. 이곳에서도 김치에 명태를 잘 썼지만 특히 신선한 명태의 아가미인 ‘서거리’를 이용한 서거리깍두기가 그립기만 하다. 서거리를 김치에 쓰는 문화는 함경도 제일 북쪽에서부터 강릉을 지나 경북 영덕까지 이어진다.

다시 남으로 내려가 삼남의 김치는 그 다양한 물산만큼이나 다양하다. 충청도 서해안을 따라서는 굴깍두기와 게국지가 별미다. 고들빼기김치는 전북 일대에서 경남 거창에 이르는 지역의 별미다.

행정구역에다 지역 김치를 가져다 붙이기는 억지일 뿐이다. 지역 김치를 논할 때에는 자연과 농어업부터 살펴야 한다. 갓김치는 여수뿐 아니라 갓이 잘 나는 여수 이동 남해안과 그 도서의 문화이다. 전남 함평에서 강화도에 이르기까지 고구마 잘되는 곳이라면, 고구마줄기김치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깻잎·풋고추·가지·양파·토마토·오이 모두 배추와 무 못잖은 지역 김치 재료다. 여기에다 지역별로 다른 젓갈과 곡물, 기본 양념의 운용이 호서와 호남의 내륙 그리고 서남해안의 김치 맛을 갈랐다. 모든 것이 내 사는 곳의 자연과 자원에 적응, 대응한 결과이다. 살아남자고 저장과 발효에 힘쓰되, 되도록 맛난 음식을 추구했다. 출발은 살아남기였지만, 사람이니까 김치 담그는 감각과 행동이 생존 너머로 벋었다.

이 계절에 다시금 뭉클하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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