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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일사일언] 알량한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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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내현·밴드 '로큰롤라디오' 보컬


소셜 미디어로 화풀이하는 것에 한창 빠져있을 때,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모 밴드를 비난한 적이 있다. '록의 부흥'을 위해 공짜로 대학가 축제를 돌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고 격분했다. 가뜩이나 '열정페이'에 민감한 이 바닥에서 이런 대담한 선언이라니. '록의 부흥'이라는 철 지난 구호는 대체 무엇인가. 게다가 기사에 언급된 밴드의 소속사는 우리 밴드와 이전에 얼굴 붉힌 일이 있었던지라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고는 잊었다. 까맣게.

1년쯤 지난 뒤 그 밴드를 세월호 추모 공연에서 만났다. 추모의 자리에서 서로 불편하게 마주하는 것이 싫어 먼저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밴드의 리더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너무도 '쿨'하게 나의 사과를 받아줬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에 스스로가 부끄러워 거푸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많은데, 이미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제 막 기획사와 계약한 밴드에게 무슨 힘이 있었을까. 그의 말대로, 비난하던 시점에서나 사과하는 그 시점에서나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기획사와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애꿎은 밴드에게 화풀이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면서 스스로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알량한 자존감에 취해 있던 내 인격의 협소함이 부끄러웠다. 그 밴드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동료 뮤지션들에게서 받은 비난과 멸시는 더욱더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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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계기로 소셜 미디어에서 멀어졌다. 이전보다 게을러진 탓도 있지만, 감정(특히 화)이 앞서서 쓰는 글은 시간이 지나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비난하고서 쿨하게 잊고 살아갈 만한 깜냥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화를 나누고 공유하고 전파하기엔 세상엔 분명 기분 좋은 일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 믿기로 했다.


[김내현·밴드 '로큰롤라디오' 보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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