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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박해현의 문학산책] '앎'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세종의 깊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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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우리말 사전 편찬 '말모이' 운동… 문인·독자들 폭발적 반응

'단음절' 단어의 느낌 유난히 특별… 간결하고 함축적인 '말의 맛'

우주와 자연, 인간 사회가 그 안에 어우러지는 한글의 참매력

조선일보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조선일보가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국립국어원과 함께 새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말모이' 운동을 펼치고 있다. 말로 먹고사는 문인들이 두 손 들어 반기고 독자들도 크게 호응한다. 새삼스럽게 모국어를 다시 들여다보고, 새로이 음미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 가운데 한 음절로 이뤄진 단어가 남달리 느껴진다. 사람 몸을 이루는 눈, 코, 귀, 입, 손, 발이 모두 단음절어다. 국어사전을 펼치면 잠, 꿈, 얼, 해, 달, 님, 봄, 비, 꽃, 샘 등등이 줄줄이 튀어나온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말의 맛을 일깨워준다.

한 음절 단어로도 풍성한 말놀이 향연

최근 시집 '간절함'을 낸 신달자 시인은 우리말 중에서 '결'이 참 좋다고 했다. "나뭇결이 되고 살결이 되고/ 물결이 되면서/ 마음결이 고운 무늬가 된다"는 시 '결'을 썼다. 숱한 시인들이 단음절어로 말놀이를 즐긴다. 최근 정끝별 시인이 낸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도 재기 발랄하다. 책을 펼치면 첫 시부터 '춤'이다. "내 숨은/ 쉼이나 빔에 머뭅니다" 하고 시작하는 시행에 시인의 실존이 압축되어 있다. '숨'은 삶을 뜻하는데, 그것이 시인의 삶에선 '쉼'이나 '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시는 달리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뜀박질을 멈추고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듯이, 시는 숨 가쁜 일상에서 벗어나 '쉼'의 언어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물질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말의 순수한 의미에서 '빔'의 상태를 지향한다. 시인의 숨은 그래서 쉼과 빔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끝별의 시는 말놀이를 이어간다. "내 맘은/ 뺨이나 품에 머뭅니다"라면서 님의 뺨과 품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님과 남과 놈에 깃든/ 한 뼘의 감금"이라고 했다. 사랑은 속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궁극적으론 합일 또는 충족의 기쁨을 주지 않는가. "요람과 바람과 범람에 깃든 한 뼘의 채움"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시인이 벌이는 사랑은 일상의 요람을 뒤흔드는 바람이고, 열정의 범람이지만, 그가 바라는 사랑은 '한 뼘의 채움'처럼 소박하기만 하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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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의 시 세계도 말놀이 향연을 풍성하게 펼친다. 산문시 'ㅁ놀이'가 재미있게 읽힌다. "오늘도 너는 말놀이를 한다. 재잘재잘. 도중에 말이 막히면 너는 물을 마신다. 벌컥벌컥. 그리고 너는 물놀이를 한다. 첨벙첨벙. 도중에 배가 고프면 너는 미음을 먹는다. 허겁지겁. 그리고 너는 맛놀이를 한다. 우적우적. 도중에 배가 부르면 너는 몸놀이를 한다. 폴짝폴짝. 그리고 너는 망놀이를 한다. 호시탐탐. 도중에 도둑을 잡으면 너는 멋놀이를 한다. 찰랑찰랑. 그리고 너는 무(無)놀이를 한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흥분할 분도 있겠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시인이 말, 물, 맛, 망, 멋, 무로 이어지는 'ㅁ(미음)'의 말놀이를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체언에 어울리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연결하면서 우리말의 독특한 맛을 일깨운다. 유튜브에서 우리말로 영어를 가르치는 어느 미국인은 "한국어의 의성어와 의태어를 배우고 난 뒤 세상을 새롭게 느끼게 됐다"며 "그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이란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감탄했다. 말은 재잘재잘, 물은 벌컥벌컥, 몸은 폴짝폴짝 저마다 소리를 낸다. 말, 물, 몸 모두 한 음절에 그치지만, 생명에 꼭 필요하기에 거대한 뜻을 담고 있다.

한글, 인간·우주를 새롭게 느끼게 만들다

내가 좋아하는 단음절어는 '앎'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 정신의 구조를 압축해서 형상화한 상형문자처럼 풀이된다. 우주와 자연, 인간 사회가 그 한 글자에 다 들어 있다. 우선 '앎'의 받침 'ㄹ'은 강물이나 길을 떠올리게 한다. 'ㅁ' 받침은 구획이나 영토, 건물을 연상케 하고 더 나아가서 국가나 사회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앎'의 위에 있는 'ㅇ'은 하늘의 해와 달을 아우르는 우주를 가리키고 더 나아가서 기(氣)의 순환도 상상케 한다. 그 옆에 있는 'ㅏ'는 무척 신비롭다. 내 눈엔 '문고리'로 보인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심층 우주로 들어가거나 현세의 바깥 저 너머를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무슨 헛소리냐고 할 분도 계시겠지만, '앎'이란 글자는 사람의 인식 구조를 껴안고 있기에 '앎'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세종대왕께서 '앎'에 그런 뜻을 담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앎'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기에 새삼 세종대왕을 우러르게 된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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