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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반기문을 차관으로 두고 장관을 하다니...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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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7회>]

홍순영 후임 이정빈 외교 장관, 청와대 설득해 반 차관 기용 확정

출근 첫날 자택 방문한 ‘박동진 사단’ 정의용 조정관에 만족감 표현

李 UN과장 시절 潘 능력 인정… 鄭은 ‘기문이 형’으로 부르며 친밀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2000년 1월 13일 오후 홍순영 외교부 장관이 갑자기 경질되고 후임에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이 임명됐습니다. 당시는 신임 장관 국회 청문회가 없을 때입니다. 이정빈 신임 장관은 임명되자마자 다음날 첫 출근해 업무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1월 14일 아침 일찍 이 장관의 첫 출근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이 장관 자택을 찾아 갔습니다. 오전 7시를 약간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이 장관은 초면이었는데,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그가 대한민국의 제29대 외교부 장관으로 처음 만난 기자에게 강조한 것은 ‘외교부 개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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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과 크리스토퍼 페튼 EU 집행위 대외관계 집행위원이 20일 오전 세종로청사에서 열린 한·EU 각료회의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00.7.20/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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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출신으로 TK 박동진 장관 신임 받은 이정빈

이 장관과 마주 앉아서 인터뷰하고 있을 때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이가 있었습니다. 정의용 당시 외교부 통상교섭조정관이었습니다. (나중에 국가안보실장, 외교부장관 역임) 정 조정관은 여러 번 이 장관 자택에 와본 듯 머뭇거리지 않고 “장관님 축하합니다” 라며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이 장관이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한 첫 마디가 의미심장했습니다. “어이,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반기문을 차관으로 두고 장관을 하다니…. 앞으로 장관은 그냥 하는 거야.”

그 때는 이 발언이 갖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외교부를 출입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던 기자는 차관에 내정된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가 어떤 외교관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반기문이 어떤 사람이길래 홍순영 전 장관은 무리해 가면서 자신의 고교 후배를 차관으로 기용하고, 호남 출신의 신임 장관은 반 차관을 데리고 장관 하는 것을 복이 많다고 하는 걸까.” 이정빈·정의용 두 사람의 첫 대화에서 반 차관이 거명된 것도 의아했습니다.

이후 외교부를 비교적 오랫동안 출입하면서 이런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관의 첫 출근길에 정 조정관이 그의 자택을 찾아올 정도로 친밀한 두 사람은 1970년대 후반 외교부 장관을 지낸 박동진 전 국회의원의 측근이었습니다. 외교부에서 YS, DJ처럼 영문 약어로 불리는 외교부 장관은 많지 않습니다. 박 전 장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TJ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는데 두 사람 모두 ‘박동진 사단’으로 분류됐습니다. 박동진은 주제네바 대사, 주유엔대사를 거쳐 1975년 12월부터 1980년 9월까지 4년 9개월간 외교부 장관을 지낸 후, 1988년부터는 3년간 주미대사로 활약했습니다. 대구 경북고-일본 주오(中央)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외교부 대구·경북(TK) 인맥의 대부이기도 했습니다.

광주고-서울법대를 졸업한 이 장관은 호남 출신이지만 ‘박동진 사단’에서 ‘허리’역할을 하며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 장관은 1970년대 주유엔대표부 근무 당시 박동진 대사를 모셨습니다. 이 장관은 TJ가 장관으로 있을 때 국제연합과장, 기획관리실 정책조정관, 아중동국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장관의 처가는 대구인데, 그의 장인(이성조 전 경북교육감)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로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그의 장인이 이따금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과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고 이 장관이 밝힌 바 있습니다. 이런 배경도 그가 박동진 사단에 합류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평도 있습니다. 이 장관은 박 장관의 신임을 받으며 호남 출신이면서도 지역 차별을 받지 않고 비교적 승승장구, 1989년부터는 2년 넘게 제1차관보로 재직하면서 한-소 수교에 깊이 관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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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박동진 외교부 장관 이임 당시 기념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빨간 원안에 있는 인물)가 2000년 장관에 임명되는 이정빈 당시 외교부 중동국장./박동진 장관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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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2 사태 때 일화 남긴 정의용

이 장관의 출근 첫날 아침, 그의 자택에서 만난 정의용 조정관은 박동진 외무부 장관의 비서 출신입니다. 1971년 제5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주캐나다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박 장관의 비서관으로 기용됐습니다. 정의용은 1979년 12·12 사태가 났을 때의 일화가 회자됩니다. 당시 한남동 외무부 장관 관저와 인접한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무장군인들이 오가며 총 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자 정의용은 박동진 장관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겠다고 판단합니다. 박 장관이 관저 뒷산을 넘어 옥수동 방향으로 ‘탈출’ 하는데 기여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박동진 장관은 1992년에 펴낸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에서 이례적으로 이정빈·정의용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박 장관은 이 책에서 이 장관에 대해 “내가 1975년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한국 문제의 유엔 총회 상정 지양 정책을 추진할 때 실무자로서 나를 잘 보좌한 정우영(전 주벨기에 대사)과 이정빈(주인도 대사)의 조직적인 노력을 나는 지금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 장관은 12·12 사태와 정의용 비서관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12월 12일) 어둠이 덮이자 단지 외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한남동) 국방장관 관사에서는 전등이 갑자기 꺼지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중략) 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 밤 11시 30분쯤 나는 한남동 관사 단지를 빠져 나왔다. 그날 밤을 신라호텔에서 새우면서 나를 따라온 신두병 총무과장과 정의용 비서관 그리고 직원 한두 명과 함께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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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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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용은 이후 주미 대사관 참사관으로 1988년 주미대사로 부임한 박동진 장관을 다시 모시게 됩니다. 그는 이정빈 장관 시절인 2000년 12월 주제네바 대사로 영전한 후, 노무현 정부에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합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안보실장, 외교부 장관으로 일하며 남북관계, 북한 비핵화 문제 등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반기문을 발탁한 이는 홍순영이고, 그를 지켜준 이는 이정빈”

이정빈 장관은 청와대로부터 갑작스럽게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당시 차관에 내정돼 있던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기용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이 장관은 1970년대 중반 국제연합(UN)과장으로 활동할 때 인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반기문과 함께 일하면서 그를 신임하고, 업무 능력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홍 장관이 내정한 반 차관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기류가 있었으나, 홍 장관을 경질한 데 이어 반 차관 내정을 취소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습니다. 이 장관은 반 차관을 기용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혀 청와대의 승인을 받아냅니다. 반 차관은 2000년 1월 27일 청와대에서 다른 부서 차관들과 함께 임명장을 받고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반기문을 발탁한 이는 홍순영이고, 그를 지켜준 이는 이정빈 장관”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입니다.

반기문과 정의용은 서울대 외교학과 선후배입니다. 사석에서는 정의용이 반기문을 “기문이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각각 정무·통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서로를 도와주곤 했습니다. 이런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이정빈은 그의 장관 첫 출근 날 정의용이 축하하러 오자 첫 인사로 반기문 차관에 대해서 언급했던 겁니다.

이 장관의 첫 출근날 아침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외교부 기자실로 출근하기 위해 내려와 보니 아파트 주차장에 외교부 장관 전용차가 와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낯익은 얼굴의 외교관이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 장관의 첫 출근길을 수행하기 위해 나온 조현동 외교부 인사계장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외교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주윤발’로 불렸던 미남 외교관인데, 평소와 달리 심각한 얼굴이었습니다. 홍 장관이 갑자기 경질되면서 앞으로 외교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많은 우려를 하는 듯했습니다. 단지 장관 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외교부에 외풍이 불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실제 외교부는 이정빈 장관이 취임한 후, 청와대의 요구로 거센 개혁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다음주 일요일에 계속됩니다>

P. S.

1. 이 장관의 첫 출근길을 수행했던 조현동 인사계장은 이후에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 ‘동맹파 대 자주파’ 논쟁에 휘말려 고초를 겪으며 ‘외교부의 풍운아’로 불리게 됩니다. 그는 윤석열 정부에서 제1차관으로 발탁된 후, 주미대사로 부임했습니다.

2. 박동진 장관은 회고록 서문에서 자신과 친분이 있던 외교관 후배들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거명해 놓았습니다. 상당수가 ‘박동진 사단’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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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 외교부장관 회고록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 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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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장관은 “외무부 본부에서 같이 일하고 나를 보좌한 직원들은 현재도 국내외에서 활약 중인 사람이 많고, 또 상당한 직위에까지 승진하였다가 이미 퇴임한 사람도 있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국장급 이상 간부와 비서관들을 거명해 본다” 고 했습니다.

제 17대 박 장관의 후임 장관 중 채용 시험 또는 고시 출신의 외교 장관은 노신영 최광수 최호중 이상옥 공로명 유종하 홍순영 이정빈 최성홍 반기문 송민순 유명환 김성환 윤병세 정의용 박진 조태열 장관인데, 이 중에서 최호중 이정빈, 정의용 장관만 ‘TJ 리스트’에 올라 있습니다. 이정빈, 정의용 두 사람은 ‘박 장관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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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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