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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이상언의 시선] ‘선한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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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주민 추방은 곧 “가서 죽어라”

이틀 만의 생사 가를 결정에 충격

칸트 도덕률 위배한 야만적 행위

중앙일보

이상언 논설위원


나쁜 게 아니라 무능력한 것이라고 믿었다.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선한 의지’는 갖고 있다고 여겼다. 성공 가능성이 있는 정책을 찾기 어렵고 비상식적인 일이 연거푸 벌어져도 잘하겠다는 뜻은 있는데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잘못된 수단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정과 무능 사이’(2018년 7월 21일 자 ‘시시각각’)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기도 했다. 그곳에 문재인 정부를 향해 ‘선한 동기가 착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 안타깝다’고 적었다.

이 기대 섞인 믿음이 깨졌다. 북한 주민 두 명 강제 추방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을 “가서 죽으라”는 식으로 내쫓았다. 그 결정을 한 누군가가 ‘북한에 가서 법적 절차에 따라 처분을 받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큰일이다.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판단하는 이가 국가 운영을 맡고 있다면, 그 나라가 정상이 아니다.

그들을 조사하고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하는 데까지 딱 이틀 걸렸다. 16명을 살해한 흉악범이라서 그랬다고 했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쉽다면 왜 고도로 훈련된 법관이 필요하며, 재판이 수개월, 수년이 걸리겠는가? 이틀 만에 살해 흉악범으로 단정하는 것은 신(神)만이 가진 능력이다. 설사 그들이 자백했다 해도(자백 여부는 모른다) 그것의 신빙성을 따져봐야 한다. 용의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것은 인간 본성상 쉽지 않다. 따라서 동기와 배경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문명국 사법 체계 안에서는 이것이 상식이다.

범죄인(북한 주민 두 명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망명 처리는 까다로운 문제다. 분단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국민이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헌법상 북한도 대한민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도 우리 국민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많다. 남북 기본합의서에는 북한을 하나의 국가적 공동체로 간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한국에서의 북한 주민의 법적 정체성은 애매하다. 통일될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할 숙명적 난제다.

이런 상황이니 범죄인 인도 조약이 있을 리가 없다. 설사 북한을 별도 국가로 인정한다 해도 정상적 사법 체계를 가진 나라로 판단이 돼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을 수 있다. 고문이 자행되거나 피고인의 방어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로 사람을 보내는 것(대상자가 범죄인이라고 해도)은 인권 유린의 공범 행위가 될 수 있다.

북한 주민 두 명의 귀순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숙제를 안겼을 사건이다. 그런데 청와대 안보실에서 신속하게 추방으로 정리했다. 그 결정을 누가했는지 불명확하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을 어떻게 그렇게 고뇌의 시간이 없이 처리할 수 있었을까? 무섭고 섬뜩하다. 인권 보호 활동에 헌신해 온 변호사가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일이 벌어졌는가? 그 대통령은 23년 전에 한국인 7명을 포함한 원양어선 ‘페스카마15호’ 선원 11명을 살해한 혐의로 한국 법원에 기소된 중국 동포 6명을 변호했다. 그는 “동포로서 따듯하게 품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구금 또는 보호 조치를 한 뒤 최대한 살해 혐의에 대해 조사하고, 북한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고, 필요하다면 방북 조사단 파견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 조사 내용을 토대로 송환 여부를 결정했어야 했다. 판사·변호사 등을 포함한 위원회를 꾸려 의견을 내도록 하고, 최종 판단을 국무회의에서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추방할지,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할지를 결정하는 게 정석이다. 그것이 ‘사람이 먼저’인, 나라다운 나라의 모습이다. 두 목숨이 걸린 일이다.

2차 대전 뒤 서구에서 “달걀을 깨지 않고서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널리 퍼졌다. 본래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나온 말인데, 유럽 좌파 정치인들이 변혁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정당한 절차나 보편적 권리가 무시되거나 유예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그 말을 했다. 전체주의 비판 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달걀은 깨졌어도 오믈렛은 간 곳 없고, 그저 무한대의 달걀, 즉 인간의 목숨이 깨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오믈렛은 잊어버린 채 그냥 계속 달걀만 깬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대북 유화 정책,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 성사, 총선 승리,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몇 명쯤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제2 정언명령이다. 21세기 문명국 한국에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서글프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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