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책의 힘으로 유럽을 일깨운 `이탈리아 도붓장수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몬테레조 마을에 있는 도붓장수의 석각 부조. [사진 제공 = 글항아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동부 토스카나주에 있는 작은 마을 몬테레조. 수세기에 걸쳐 이 마을 사람들은 유랑책방으로 생계를 이었다. 지금도 매년 여름, 마을에서는 책 축제가 열린다. 이 도붓장수들 덕분에 이탈리아 각지에 서점이 생겼고 읽는 행위가 퍼져 나갔다.

저널리스트인 우치다 요코는 베네치아의 고서점 '베르토니' 주인의 추천으로 이 마을을 알게 됐다. 말수가 적고 온화한 인상으로 손님들에게 책을 찰떡같이 소개해주는 이 주인장 알베트로는 어디서 책을 고르는 법을 배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대대로 떠돌아다니며 책을 파는 집안에서 태어났거든요." 몬테레조의 후손으로 알베트로는 베네치아의 서점을 3대째 지키고 있었다. 저자는 마을을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찾아 방문하고 싶다고 연락했지만, 정작 마을 사람들은 직업과 가정이 대다수 외지에 있었다. 손님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주말에 고향으로 모이기로 했다. 몬테레조는 21세기에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까운 기차역에서 15㎞ 넘게 떨어져 있었고, 가파른 산길 때문에 운전하기도 쉽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당당한 마을 표지 옆에는 헤밍웨이의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 마을이 제정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문학상인 '유랑책방상' 제1회 수상작가였다. 전국 서점에서 각자 책 한 권을 추천한 다음 최종 후보 6작품 중 하나를 선정하는 문학상이다. 상금 대신 2000부를 구입해 형무소나 병원 등에 기증하도록 했지만, 수상작들은 이 마을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마을 광장에는 광주리를 어깨에 짊어진 사내의 조각이 서 있었다. "이 산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 뜻을 실어 나른, 늠름하고 용감한 유랑책방 사내들에게 바친다." 비문에 작가는 할 말을 잃었다.

매일경제

몬테레조 인근에는 중세부터 교역으로 번창한 베네치아가 있었다. 몬테레조 남자들은 타지를 떠돌며 행상하는 팔자를 타고났다. 척박한 고향땅에는 농지조차 없었고, 남자들은 '팔뚝 힘' 하나로 타지에 가서 일손을 팔았다. 경기가 안 좋으면 타지에도 일자리가 없었다. 마을에는 내다 팔 물건도 없었다. 봄이 되면 마을의 유일한 토산품인 숫돌과 밤을 등에 지고 산을 넘어갔다가 이들을 다 팔고 나면 빈 광주리에 책을 위탁받아 다시 팔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 축제, 소시지 축제, 오리 축제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열린다. 몬테레조의 감사제는 그래서 책 축제가 됐다.

책을 우리가 들고 다니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보급된 뒤 베네치아는 순식간에 유럽 출판의 중심지가 됐다. 15세기 약 500만권이 만들어진 책은 16세기 2억권으로 증가했다. 1501년 베네치아 마누치오 인쇄소가 최초의 문고본을 만들어냈다.

책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핀 또 하나의 사건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이었다. 강한 민족 의식이 부흥했고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정보에 대한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나폴레옹 세력권에서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삶의 여유도 생겼다. 그 시기 책을 파는 몬테레조 도붓장수들이 등장했다. 서점의 비싼 전문서적과 달리 싸고 재밌는 모험담, 연애소설 등을 만날 수 있는 유랑책방을 사람들은 기다렸다. 1858년 몬테레조 마을 인구 850명 중 70명의 직업이 책장수로 기록돼 있을 정도다.

책의 순례길을 뒤쫓으며 저자는 몬테레조의 힘이 뭘까 곰곰히 따져봤다. 몬테레조 인근에 책과 관련한 여러 사건이 많았지만, 정작 인구가 32명인 이 마을에는 책의 자원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가진 건 돌과 밤나무와 산길뿐, 서점이나 출판사, 학교조차 없는 마을이었다. 비밀은 책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었다. 이들은 책을 팔며 손님을 모으는 재주도, 지나다 들은 정보를 전하는 재주도 배웠다.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의 통치 속에서 독립을 꿈꾸던 시기, 이들은 금서를 날랐고 과묵함과 근면함으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신뢰를 얻었다.

20세기 초 생겨난 봄피아나, 리촐리, 돈다도리 등 이탈리아 대표적 출판사들은 직접 몬테레조에 찾아와 이들에게 판매를 맡겼다. 몬테레조 사람들은 책의 힘으로 전 세계에 뿌리를 내렸다. 이 후손들이 바르셀로나로, 볼로냐로, 베네치아로, 유럽 각지로 떠나 지금도 서점을 열고 있는 것이다. 한때 그 숫자는 100개가 넘었다. 축제에 참가한 한 작가는 이들을 신에게 선택받은 특사라고 말했다.

다시 찾은 8월, 축제 기간이 되자 이곳은 200명이 넘게 머무는 곳으로 변신해 있었다. 광장에서 길을 따라 고서적 노점상이 줄지어 생겼다. 책을 쌓아 만든 산에서 아이들과 개가 뛰어다닌다. 이들은 광주리 대신 쇼핑백에 책을 넣어준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책은 여전히 미지의 행선지로 가는 창이었다.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해, 책이 만들어낸 한 마을의 기적을 추적해나가는 흥미진진한 논픽션이다. 2019년 이탈리아일본재단에서 최우수 저널리즘상인 움베르토 아녤리상을 받았다.

[김슬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