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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무릎꿇고 손 들게 함, 책 집어던짐, 부모 엮어 욕… 아, 한국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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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국감 화제 '김박사넷' 유일혁 대표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

대학원생의 삶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유머다. '서울대저널 TV'에 소개된 이런 콩트도 있다.

'학부생: 교수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교수님: 노을아(대학원생), 내일까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어오렴.'

교수의 노예라는 대학원생의 삶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사람이 있다. 교수 평가 사이트 '김박사넷'의 유일혁(35) 대표다.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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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오픈한 '김박사넷'은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의 청문회장,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장 등에서 언급되며 학계의 엄청난 화제 중 하나가 됐다. 과기부 관계자는 "우리가 몇 십 년 동안 못한 대학원 연구실 환경 개선이라는 일을 김박사넷이 해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박사넷의 주요 자료는 우선 정량 데이터. 서울대·포항공대·카이스트 등에 재직 중인 교수 7000여 명의 최근 5년간 SCI 논문 수, 피인용 횟수, 석사·박사 졸업생 수, 박사 입학 후 졸업까지 필요한 평균 학기 수 등이다. 그리고 졸업자나 재직 중인 학생이 교수나 연구실 분위기에 대해 정성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1만5000여 '한 줄 평'이 있다. 이 중 한 줄 평이 월 12만~13만명이 사이트를 방문하게 하는 요소다.

우리가 모르는 대학원생의 삶은 어떨까. 유 대표는 왜 이런 사이트를 만들었을까.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김박사넷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함께 한 줄 평을 '감상'했다. 그 안에 대학원생의 희로애락이 있었다. 유 대표는 교수들의 민원이 폭포처럼 밀려든다는 이유 등으로 사진 촬영을 사양했다.

"연구실에 박사가 없는 것으로 말 다함. 석사생들이 매주 같은 옷 입는 거 보면 월급을 얼마나 적게 주는지 알 수 있음."(H대 P교수)

―박사 졸업까지 걸리는 시간이 중요한 평가 요소로 보인다.

"국내 교수가 가지는 많은 권한 중 대학원생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이 '졸업시킬 권한'이다. 교수는 원하면 언제까지든 졸업을 안 시킨다. 그렇게 해도 교수가 받는 페널티는 전혀 없다. '이 학생은 아직 졸업할 준비가 안 됐다'는 말 한마디면 끝이다. 이렇게 날려버린 시간은 학생에겐 엄청난 '기회비용'이다. 박사 때까지 시간이 1년만 더 걸린다고 해도 그만큼의 연봉이 날아가 버린다. 교수는 학생에게 언제 졸업할 수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교수 말을 잘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 이 상황이 힘들 경우 학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다. 석사는 많은데 박사가 없고 졸업이 늦는다? 그 방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대생이 한 명도 없는 연구실은 이유가 있음. 스트레스로 일찍 죽고 싶은 사람, 석사 학위는 가지고 싶지만(얻을 수 있을지는 모름) 취직은 못 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연구실."(K대 S교수)

―연구실 내 자대생 비율은 왜 중요한가.

"'실적 고리'라는 게 있다. '실적이 좋다→교내 소문이 난다→자대생이 몰린다→자리가 부족해 졸업이 빠르다'다. 반대는 악순환이다. '실적이 나쁘다→교내 소문이 난다→자대생이 안 간다→타대생이 들어간다→인원이 부족해 잡일이 많아진다→교수는 인력이 부족해 졸업을 안 시킨다'다. 사실 이 사이트를 만든 것도 정보가 약한 타대생들을 위해서였다."

조선일보

해당 교수에 대해 재학생·졸업생들이 연구실 분위기·인품·강의 전달력·논문 지도력·실질 인건비 등으로 평가한 오각형 그래프. /김박사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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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나.

"나도 같은 대학원생이었다. 서울대 재료공학부를 졸업한 후 석사까지 했다. 난 다행히 좋은 교수님을 만나 힘든 건 없었다. 다만 공부가 맞지 않았고 사업을 하고 싶어 변리사 자격증을 땄고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숙면 사업, 사회인 야구 앱 개발 등을 실패한 후 세 번째로 도전한 아이템이 김박사넷이었다. 대학원생 시절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 싸대기 때림. 무릎 꿇고 손 들라고 함. 책 집어던짐. 자기 기분 나쁘면 탁자 뒤집어엎고 육두문자 욕. 부모랑 엮어서 쌍욕 함." (P대 K 교수)

―한 줄 평을 통해 교수들의 갑질이 그대로 노출된다. 교수들의 보복이 우려된다.

"사이트를 만들 때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익명성이다. 한 줄 평을 남기려면 별도 로그인 없이 해당 학교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된다. 새 한 줄 평을 등록할 때 이전 한 줄 평이 뜨지도 않는다. 뒤에서 교수가 지켜보고 있을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평을 남긴 후 업데이트도 일정 시간 후 된다. 교수들이 모르게 하기 위함이다. 학생들로부터 '한 줄 평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감사 메일을 셀 수 없이 많이 받았다. '교수들이 김박사넷을 의식해서인지 변화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교수와 학생 간 대화가 많지 않아 오해했던 부분이 풀렸다는 교수들 메일도 있었다. 갑질 교수가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연구실 문화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생각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한 줄 평은?

"모스부호로 '오지 마'라고 적힌 것(웃음)."

"김박사넷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교수."(S대 C교수)

―지난 9월 C교수가 김박사넷을 대상으로 제기한 명예훼손·정보통신망법 관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교수가 항소해 항소심을 준비 중이다. 원래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교수다."

―자세한 내용을 보려고 하니 대부분 글이 '해당 교수의 요청으로 블록 처리 되었습니다'라고 돼 있더라.

"한 줄 평 때문에 명예훼손 등을 언급하며 항의하는 교수가 너무 많았다. 삭제 요청도 많다. 그래서 최근엔 교수들이 직접 요청하면 블록 처리만 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의사 전달은 충분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이트를 운영한다고 해서 (정년 보장된) 교수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는 없다. 학생들 지원이 줄어드는 정도다. 우리가 기대하는 효과는 단 하나다. 그동안 교수들 갑질이 10이었다면 우리 덕분에 1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는 것이다."

"내가 본 교수님 중 바른 학자·지식인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신 교수님. 이제 연배가 꽤 되시는데도 항상 최신 논문도 많이 읽으시는 걸로 앎."(최기영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전 교수·현 과기부 장관)

―최기영 과기부 장관은 김박사넷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 청문회에서 화제였다.

"우리도 이슈가 되는 교수가 있으면 검색해보는데 최 전 교수는 평이 매우 좋아서 청문회 결과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최 장관 청문회 후 김박사넷에 대한 교수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그 전에는 자신에 대한 악평만 보고 우리 사이트를 '교수 욕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최 장관 사례를 보고 '좋은 사람에겐 호평도 하는구나'라고 생각이 바뀌었다더라. 그래서인지 청문회 후 악플을 지워달라는 항의 메일도 덜 온다. 대신 학생들에게 '호평을 남겨라' 하는 강요가 생겼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학생들이 바보인가? 강요로 남겨진 건 어떻게든 티가 난다."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는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신성철 한국과학기술원 총장에게 김박사넷 화면을 보여주며 "학생들이 대학원 정보를 얻을 곳이 없다. 과학기술원이라도 연구실 정보를 오픈할 생각이 없나"라고 질의해 화제였다.

"우리 사이트가 국감장까지 등장할 거라는 예상은 못 했다. 긍정적 효과라고 생각한다. 김박사넷의 본질도 '정보 공개'다. 앞으로 우리 계획도 한국 대학교수들의 실적을 미국·일본의 동일 계열 교수들 실적과 비교하는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에선 유명한데 실적으로 보면 세계에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려주고 싶다. 한국으로 유학 오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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