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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일사일언] 숙녀가 된 걸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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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그날의 당혹스러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열네 살 끝자락을 보내던 겨울방학 어느 날, 밤새 내리던 함박눈이 그치지도 않고 내 방 창밖 감나무에 소복소복 내려앉았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는 신이 난 뽀삐가 마당을 헤집고 뛰어다니며 컹컹 짖는 소리, 점심을 준비하시는 엄마의 나지막한 도마질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어제 밤새 읽다가 덮어 둔 책을 다시 펴들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사랑에 목숨 거는 안나 카레니나보다 욕망 속에서 고뇌하는 라스콜니코프가 훨씬 근사한걸. 확실히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내 스타일이야.'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하게만 보이던 그때, 난 사춘기의 문을 열고 있었다.

갑자기 아랫배에 뭉근하게 번지는 통증.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향긋한 단내가 풍기는 군고구마까지 먹은 터라 화장실을 가야 하는 건가. 차가운 화장실을 생각하니 선뜻 일어나지 못하고 아랫목의 온기에 다시 한 번 뭉그적거리는데 얼마 못 가 느껴지는 축축함. 아, 어쩌나. 밥 먹어야지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속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으며 내 방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결국 방문을 열고 들어 온 엄마에게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가만히 등을 토닥거리시더니 생리대를 가져와서 사용법을 알려주셨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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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퇴근하는 아빠의 손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열네 개 초에 불을 붙이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던 엄마 아빠의 얼굴. "우리 딸, 숙녀가 된 걸 축하해." 생리대가 없어 밤새우는 소녀들의 이야기에 난 어쩐지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매일의 끼니 걱정 속에 한 달에 만원, 그건 너무나도 큰돈이겠지. 그래서 휴지 뭉치로, 몇 번이고 빨아 써야 하는 손수건으로, 결국 신발 깔창까지 손에 들었겠지. 그래도 깨끗한 생리대는 마음 놓고 사서 쓰렴. 여자로 성장하는 너를 위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작은 응원을 담아 정기 후원자 등록 버튼을 눌렀다.





[최여정 '이럴 때, 연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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