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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일사일언] 우리 엄마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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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송은혜 2019 신춘문예 동화 당선자


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다섯 살 아이에게 우유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키 크려면 우유를 마셔야 한다는 공식을 힘주어 말했다. 12월이 생일이라 또래보다 키가 작은 아이는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우유를 꿀꺽꿀꺽 마셨다. 입 주위에 하얗게 묻은 우유 자국을 거울에 비춰 보더니 할아버지로 변신했다며 얼른 뒷짐을 졌다.

달콤하고도 사나운 연년생 남매는 나를 '엄마'로 키워내고 있다. 3분이면 완성하는 인스턴트 볶음밥, 월요일 휴무를 깜빡하고 찾아간 박물관, 택시를 타고 지갑을 깜빡해서 쩔쩔매는 일 등을 함께 겪어내고 있다. 아이들은 경쟁하듯 엄마의 실수담을 풀어놓는다. 헛기침을 하고 눈치를 줘도 저희들끼리 깔깔대며 데굴데굴 구른다. 구겨진 체면을 조금이라도 펴 보고자 꼿꼿한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용건이 있으면 엄마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와서 말할 것, 엄마는 너희의 친구가 아님을 강조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들과 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장난감 방에 들어가 한번 나와 보지 않았다.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 벌컥 장난감 방문을 열고 어지럽힌 장난감을 치우면서 놀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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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똑똑 할 줄 몰라?" 첫째가 새침데기처럼 말했다. 나는 가족끼리 비밀을 갖는 게 아니라고, 노크는 생략해도 괜찮다고 둘러댔다. 때마다 울리는 알람처럼 밥 먹기, 양치질하기, 책 읽기를 알려주었다. 이불을 자꾸 발로 밀어내는 첫째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하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잘 시간에 딴청을 피우나 싶어 나무랐더니 연고를 찾는다고 했다. 아이의 엄지발톱이 깨져 있었다. "언제부터야? 왜 말 안 했어?" "했어."

아이는 아까 집에 오는 길에서부터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내가 키를 낮추고 아이와 눈을 맞추지 않아서 듣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얇게 펴 발라야 하는 연고를 듬뿍 아이 발가락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잠든 아이를 발견하곤 얼굴이 붉어졌다.




[송은혜 2019 신춘문예 동화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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