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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슈 미술의 세계

日 도굴 만행 피한 고분, 1500년 전 가야 만날 길 열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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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의 63호분. 문화재청 제공


사적 514호로 지정돼 보호 중인 경남 창녕의 교동·송현동 고분군에는 250여 기의 고분이 존재한다. 창녕 지역을 근거로 했던 비화가야의 사람들이 5세기 중·후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8일 이 곳에서 특별한 무덤 하나를 공개한다. 63호분, 봉토의 높이가 7m, 지름이 21m에 이르는 대형 무덤으로 최고위급 인물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처음으로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확인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시신을 안치한 매장주체부를 덮고 있는 판석을 이날 들어 올리면 1500여 년 전 조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위적인 훼손이 없는 만큼 다양한 고고학적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크다.

63호분이 도굴을 피했다는 사실 만으로 주목을 받는 것은 가야 고분의 도굴 피해가 그만큼 컸다는 의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반도의 고분은 엄청난 도굴 피해를 입었는 데 교동·송현동 고분군도 주요 지역 중의 하나였다. 출토된 금은제 장신구, 옥류, 철제 무기, 마구, 토기 등이 ‘마차 20대, 화차 2량’ 분량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부장품이 풍부했는데 상당수가 일본인 소장자들에게 팔려나갔다. 물론 도굴과 부장품의 유출은 고분에서 얻을 수 있는 고고학 정보의 치명적인 훼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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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m 정도의 판석으로 봉인된 63호분의 매장주체부. 문화재청 제공


◆“창녕 고분은 거의 전부가 도굴되어 유물이 없다.”

“봉토 정상에서 산 밑에 이르기까지 수직으로 폭 수척, 깊이 3, 4척의 정연한 참호를 파 뚫은 후에 중지하였다. 대낮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것이 아닐 수 없다.”

1920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가 경남 창녕의 고분을 조사하고 쓴 보고서 내용의 일부다. 도굴 수법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는데 ‘대낮’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여 당시 만연했던 도굴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창녕 지역 고분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음을 확인하는 보고서들이 제출됐다.

“(창녕 고분은) 거의 전부가 도굴되어 내부의 유물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1930년, ‘소화오년고적조사사무보고’)

“ 유독 고분만은 200기가 넘는 다수기 몇 기도 남지 않고 대부분 도굴된 일은 지극히 유감이다.”(1931년, ‘소화오, 육, 칠년도 복명서’)

일본인 학자들 스스로 “현대인의 죄악과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고자 한다면, 이 곳 고분군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개탄할 정도로 도굴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일제 당국에서도 주목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도굴 과정에서 고분의 구조가 훼손되고 부장품의 위치, 매납 형태 등이 왜곡되면서 고분이 품고 있는 학술적 정보들이 왜곡되었음을 물론이다.

63호분이 도굴 피해가 없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연구소에 따르면, 63호분의 매장주체부는 길이 6.3m, 폭 1.4m, 깊이 1.9m의 규모로 돌로 네 벽을 만들었고, 2m 가량의 판석 7개로 덮어 봉인했다. 내부에는 시신과 부장품이 매장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금은 봉분의 조성방식까지만 파악됐지만, 매장주체부를 개방한 뒤에는 가야의 장례방식, 매장의례, 부장품의 양상 등에 대해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고고학적 정보까지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양숙자 학예연구실장은 “63호분은 조금 늦은 시기에 축조된 다른 대형고분 39호분에 가려져 노출되지 않아서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매장 주체부 내부가 한번도 인위적인 훼손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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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인 수장가를 대표하는 오구라 다케노스케.


◆도쿄박물관에 소장된 가야의 보물들

도굴꾼들은 어째서 교동·송현동의 고분을 그처럼 집요하게 노렸을까.

교동·송현동 고분군 뿐만 아니라 가야 고분들이 도굴 범죄의 타겟이 된 것은 부장품이 풍부하고, 그 중에서도 유통을 시키면 돈이 되는 금속제 유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도굴은 아니지만 일본인 학자들이 ‘학술조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고분 하나를 2, 3일 만에 조사하고 끝내버리는 ‘날림 발굴’의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이는 고대 가야 지역을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도굴된 유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당량이 당시 일본인 수장가들에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약탈문화재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오구라 컬렉션’에도 교동·송현동 출토 유물이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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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컬렉션의 하나인 금동조익형관식.


우에하라 스에지라는 일본인 학자는 “부장품은 산일하여 대구의 이치다 지로, 오구라 다케노스케 외의 사람들의 소장으로 돌아가 그 중에는 아국(일본)의 국보와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된 귀중품도 있다”고 증언했다. 문화재 수집가로 유명한 이홍직은 “(오구라가) 대구에 자리를 잡고 창녕 일원 삼국시대 고분의 도굴품을 사들여 도굴을 조장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에는 ‘전 창녕 출토품’으로 기재된 ‘금동투조관모’, ‘금동조익형관식’, ‘단룡문환두대도’, ‘금제태환이식’ 등 7건 8점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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