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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통상협상 저승사자… 수틀리면 상대방 서류, 종이비행기로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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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표, 제프 게리시 부대표, 제이미슨 그리어 사무총장, 패멀라 마커스 부사무총장, 조셉 발룬 법률자문위원.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핵심 직책을 꿰찬 '트럼프 통상의 5인방'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모두 같은 로펌 출신이다. '스캐든압스'. 미국 내 매출액 기준 4위(연매출 24억달러)로 뉴욕에 본사를 둔 초대형 엘리트 로펌이다. 기업 인수·합병(M&A) 전문이지만,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미국 제조업 기업들의 이익 대변자로도 이름 높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최대 무기가 '통상'이라면, 무기의 칼자루를 쥐고 사정없이 휘두르는 건 바로 이 5인방이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USTR이 역사상 이토록 강한 힘을 마구 휘두른 적이 없었다"면서 "공포의 외인구단이 세계 통상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인구단의 감독 겸 에이스가 바로 라이트하이저(Lighthizer·72) 대표다. 1980년대 세계 최고의 무역국가였던 일본을 무릎 꿇렸던 그는 지금은 제조업 세계 최강국이 된 중국을 상대로 관세 폭탄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하는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새로 만들었고, 일본·EU와도 통상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최고의 협상가'로 불리는 그는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를 상징하는 남자다.

캐나다를 휘어잡은 공포의 외인구단

USMCA 협상 협정문 종료 시한이 임박했던 작년 9월 말. 당시 미국은 기존 NAFTA를 미국에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하기 위한 USMCA 협상을 주도했는데, 멕시코와의 협상에 주력하다 보니 캐나다를 소외시키게 됐고 캐나다는 자신들이 빠진다면 어차피 이 협상이 타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버티고 앉은 상황이었다.

캐나다의 전략이 거의 성공할 뻔한 순간, 라이트하이저와 USTR 팀은 미-멕시코 양자 간 협정문을 갑작스레 공개했다. 법 조항 등이 완벽한 수준으로 작성돼 즉시 타결해도 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 그림대로라면 캐나다는 북미 경제에서 '왕따'가 될 것이 자명해지는 상황이었다. 캐나다는 결국 황급히 협정문에 조인했고, 미국 입맛에 딱 맞는 협정이 타결됐다.

라이트하이저는 지난 9월 미·일 무역 협상에서도 70억달러 규모의 일본 농산품 시장을 얻었다. 대신 내준 것은 일본산 기계류나 터빈, 부품 등에 대한 관세를 낮춰주는 정도였다. 일본 아사히는 전직 USTR 관계자를 인용, "일본이 이 정도로 양보한 것이 매우 놀랍다. 일본이 미국이 꾸민 판에서 싸웠다"고 비판했다.

최근 세계무역기구(WTO)의 상소기구에 신임 위원을 임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무력화하는 것도 라이트하이저의 작전이다. WTO가 사라지면, 경제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 있게 된다. 딱 미국이 원하는 방향이다. 미 월간 디애틀랜틱은 "라이트하이저는 미국의 입맛에 맞게 글로벌 세계 질서를 바꾸고자 한다"고 전했다.

'미사일 맨' 라이트하이저

라이트하이저는 1947년 미국 오하이오주 북부 이리호(湖)와 붙어 있는 항구 마을 애슈터뷸라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인디언어로 '나눠 먹을 물고기가 마르지 않는 곳'이란 뜻. 미국 철강 산업이 부흥했을 땐 철강 수출항으로 번창했지만, 자유무역으로 미국 철강이 경쟁력을 잃자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시골 마을 중 하나가 됐다.

조선비즈

올 2월 베이징에서 류허(오른쪽) 중국 부총리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USTR 대표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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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그는 1983년 36세의 나이로 USTR 부대표에 선임됐다. 일본과의 협상에선 일본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자 협상 문서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상대에게 날려버린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그때의 종이비행기가 일본 측 대표단엔 미사일처럼 보였다고 해, '미사일 맨'이란 별명을 얻었다.

1985년 USTR에서 나온 그는 스캐든압스에 변호사로 합류, US스틸을 대변해 중국 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파헤치는 데 30여년을 몰두했다. 그는 중국의 WTO 가입을 두고 "중국은 진정한 시장 경제가 아니므로 규정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며 강력 반대했었다. 그런 점에서 2017년 트럼프가 그를 USTR 대표로 백악관에 복귀시키자,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선 '1980년대 일본을 제압했듯, 중국을 좌절시키기 위한 카드'라고 해석했다.

관세를 무기로 제조업을 살린다

30년 전에도 지금도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관세의 '무기화' 전략이다. 중국에 '징벌적 관세' 패키지를 마련한 데 이어, 한국·일본·EU엔 자동차 관세 부과 카드를 조율하고 있다. 대규모 관세 부과 엄포를 놓으면, 해당 국가는 관세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수출을 제한한다. 미국으로 들어오는 수입 물량이 줄어들고, 미국에선 부족분을 대체하기 위해 생산활동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부흥한다. 라이트하이저는 이 같은 관세를 합리화하는 '법적 장치'를 확보하는 데도 탁월하다. 특히 글로벌 통상 정책과 법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으며 최신 무역 이슈에도 익숙하다.

['미사일 맨'로버트 라이트하이저(Lighthizer·72)]

―1947년 오하이오 출생,
―1981년 미 의회 금융위원장 비서실장
―1983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레이건 행정부)
―1983~1985년 일본과 '플라자 합의' 등 협상 20여 건 참여
―1985년 로펌 '스캐든' 파트너 변호사(이후 32년간 미국 철강 기업을 대변)
―2017년 USTR 대표 (트럼프 행정부)
―2018년 미·중 무역 분쟁 미 협상 대표, USMCA 체결
―2019년 미·일 무역협상 체결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협상 4]

☞무역확장법 232조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수입품에 고율 관세를 물릴 수 있게 하는 법 조항. 1962년 이후 사실상 사문화됐던 조항을 꺼내와 통상 전쟁의 무기로 만든 인물이 라이트하이저.

☞미·일 무역협상

지난 9월 타결된 양국 간 무역협상으로, 일본이 70억달러 농업 시장을 미국에 개방하는 대신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를 사실상 면제받은 것이 골자. 라이트하이저가 232조를 근거로 일본을 압박, 미 농업 분야가 큰 이익을 본 것으로 평가됨.

☞USMCA(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

북미 3국이 기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 A)을 개정해 새로 추진하는 무역협정으로, 미국 측 대표인 라이트하이저가 주도해 미국 자동차·자동차 부품 산업에 유리한 조항이 다수 포함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

☞플라자 합의

1985년 미국·프랑스·독일·일본·영국의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외환시장에 개입, 미 달러를 일본 엔과 독일 마르크에 대해 절하시키기로 합의한 건. 엔화 가치의 상승으로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됐음. 당시 라이트하이저가 실무진 중 한 명으로 참여.

윤형준 기자(b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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