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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김규나의 소설 같은 세상] [37] 뜬구름 같은 열정이 불러온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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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규나 소설가


마치밀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제 엄마의 죽음을 초래한 막내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그는 사진 속 시인의 얼굴과 아이의 이목구비를 꼼꼼히 비교해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장난인 것일까. 엘라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의 특징이, 꿈꾸는 듯 독특한 그의 표정이 아이 얼굴에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머리카락마저 시인과 똑같은 색이었다. - 토머스 하디 ‘환상을 좇는 여인’ 중에서

세 아이 엄마로 살면서도 소녀 같은 감수성을 지닌 엘라에게 현실은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여름휴가를 보내고자 빌린 집이 젊은 시인의 집필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야 엘라의 심장은 비로소 뛰기 시작한다. 아, 시인에 비하면 남편은 얼마나 천박한 장사꾼인가. 이후 엘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에 대한 사랑을 남몰래 키워간다. 닿을 듯 말 듯,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회가 몇 번 어긋나고 시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충격을 받은 엘라는 시름시름 앓다가 넷째 아이를 낳은 뒤 죽고 만다. 남편은 뒤늦게 시인과 아내, 둘 사이를 의심하고 아이를 살펴본다. 배 속에 생명을 품은 채 외간 남자를 오매불망 바랐기 때문일까. 아이의 외모는 거짓말처럼 시인과 쏙 빼닮았다. 남편은 멀쩡한 자기 아이를 밀쳐내며 외친다. "저리 가. 넌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놈이야!"

조선일보

뜬구름 같은 열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죽음에 이른 엘라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 마치밀, 그 결과 버림받은 아이. '테스'로 친숙한 영국 작가 토머스 하디가 1893년에 발표한 '환상을 좇는 여인'은 처지를 망각한 인간의 갈망이 어떻게 운명을 조롱하고 죄 없는 존재에게까지 불행을 가져다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내는 U2의 공연을 관람했고, 남편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까지 밀쳐놓고 멤버를 만났다. 인권, 반전, 환경을 부르짖는 진보 성향의 세계적 록밴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룹이다. 한 발 한 발이 외교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그 부부가 불러올 결과가 엘라 부부의 비극적 결말과 다르기를 바랄 뿐이다.

[김규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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