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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인-잇] '간절했던 목표' 이루고 나면 허탈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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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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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꼰대' 18편: '간절했던 목표' 이루고 나면 허탈한 이유는

사람들은 때론 작은 목표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한다. '집에서 출발하여 회사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1시간'이란 나의 목표도 이와 같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매일 자가용으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면서 나는 출근이나 퇴근에 매번 최소 60분에서 많게는 8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집이든 회사든 출발해서 '1시간 안에 도착'이라는 목표를 나도 모르게 갖게 되었다.

이 날도 '1시간 내 도착'을 위해 나는 신호등 앞 정지선에서 급출발도 하고, 측정기가 없는 곳에서는 슬쩍 속도도 내고, 차선도 좌우로 바꾸는 등 무리한 운전을 했다. 느릿느릿 가며 내 진로를 막는 앞 차 운전자에게는 마음속으로 혼자 욕을 했고, 신호등에서 어쩔 수 없이 서야만 할 때는 탄식을 하며 도로 신호체계를 비난했다.

물론 한결 중요한 목표도 있었다. 당시 내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회사 내 목표가 이에 해당했다. 나는 '우리 지사가 그 해 년도 조직 평가에서 1등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과거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쾌감, 만족감을 떠올리며, 이번엔 필히 1등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나는 사실 이 목표를 위해 몇 달 전부터 조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판매, 운영, 관리 부문에서 매주, 매달 항목별 성과분석을 하면서, 지점장과 담당자들에게 부족한 점을 조속히 개선하라고 은근한 압박을 가했다.

물론 조직원들은 힘들어하는 건 눈치챘다.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굳이 1등을 하겠다는 내 생각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난 "목표 달성 시의 기쁨을 생각하자!"며 조직원들을 달래고 동기를 부여하려 애썼다.

아, 이제 신호등이 많은 구간이다. 여기서 얼마나 시간이 절약하느냐에 따라 오늘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신호에 걸렸다. 이런 또 걸렸다. 목표 달성에 실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라디오에서 그리스 신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르고호 모험의 주인공 이아손은 성장한 후에 나라를 다시 되찾기 위해 당시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숙부에게 찾아가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숙부는 나라를 이양하기 싫은 마음에 불가능한 미션, 그러니까 저 멀리 '콜키스'라는 나라에 보관되어 있는 민족의 가보 '금양모피'(황금 양의 털가죽)를 찾아오라고 합니다. … 그래서 그 유명한 아르고호의 모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이아손의 모험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영웅 54명이 겪었던 모험을 살펴볼까요? 항해 도중 그들은 렘로스의 고약한 냄새 나는 여인들을 구제했고, 악당 권투선수 키지코스 왕을 제거하였으며, 천기를 누설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굶는 형벌을 받은 피네우스를 저주에서 풀어 주고… 결국 콜키스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황금양피를 찾는 과정이 역시 수월치 않습니다. … 콜키스 왕의 딸 메데아의 도움으로 세가지 난관을 통과한 후 이아손은 드디어 금양모피를 갖게 됩니다."

'야, 온갖 죽을 고생을 다 하고 금양모피를 갖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대단했겠는걸.' 나는 이아손이 누렸을 영광과 기쁨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라디오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아손의 이야기는 사연이 길고 곡절이 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아손은 그 금양모피를 떡갈나무에서 벗겨 들고 아르고선에 올랐다.'는 짤막한 한 마디로 끝납니다. 결말이 싱겁죠. 왜 그럴까요?"

길고 긴 모험의 가장 영광스러운 대목을 기대했건만 이렇게 맥없이 글을 끝내버리다니. 거기다 듣는 사람에게 결말이 왜 싱거운지 맞춰 보라고? 속으로 혼자 항의를 하는데, 아나운서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오비디우스는 말했습니다. '금양모피 역시 손에 넣는 수고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아손이 찾아다닌 것은 실은 금양모피가 아니었을 테니까요."

뭐라는 거야? 뭐가 하찮다고? 라디오 방송에 낚시질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입을 삐죽거릴 때, 또다시 눈 앞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아, 이제 '1시간 내 도착'이라는 목표 달성은 불가능해졌구나. 이리저리 끼어들고 틈만 나면 속도를 내던 오늘 아침 나의 노력도 다 수포로 돌아갔구나.

그러나 짜증도 잠시. 아예 포기를 하니 오히려 마음이 묘하게 편안해졌다. 안정을 되찾자 갑자기 '금양모피가 하찮다'는 오비디우스의 말이 이해가 될 듯도 했다. 목표 달성의 순간에는 매번 크나큰 만족감을 느꼈지만, 그 좋은 감정이 사실 그렇게 오래가지도 않았다. 짧게는 몇 분, 길어 봤자 한두 달 의기양양해 있었을 뿐.

또 막상 목표한 걸 얻고 나면, 얻으려고 노력하는 순간에는 대단하게 보였던 그 목표가 사뭇 시시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이것 때문에 그동안 그 많은 것들을 희생했나?' 하는 허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직원들도 좀 덜 괴롭히고 나 스스로도 마음을 좀 편히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무겁고 긴장됐던 마음에 온기가 퍼지려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어, 사업부문장 전화다. 왜 서비스 관련 목표가 미달됐냐며 엄청 나무란다. 사유를 설명하려 하자 자신은 여러 소리 필요 없다며 아예 전화를 끊는다. 하아…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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