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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사설] 입법부 수장이 행정부 수장 밑으로, 부끄러움을 잃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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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가 임박한 이낙연 총리의 후임으로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거론되고 있다. 확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정권과 당사자가 검토하고 있는 그 자체로도 부적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장은 대통령 다음으로 국가 서열 2위이지만 헌법상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삼권분립의 한 축이다. 실질 권력은 대통령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 마땅한 자리다. 국회를 대표했던 전직 국회의장이 행정부 수장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국회를 행정부의 하위 조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을 희화화하는 처사다.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인가.

정 전 의장이 의사봉을 잡았던 시기가 오래전도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처리한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 수장이었다. 국민 머릿속에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정 전 의장이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총리 임명장을 받고 문 대통령을 대리해서 국회에 출석해 대정부 질문에 답한다면 그게 무슨 꼴인가.

정 전 의장은 2006년 초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곧장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144명의 여당 국회의원을 지휘하던 당 대표가 일개 장관으로 격을 낮췄다"는 비판을 당 내외에서 받았다. 정 전 의장이 이번에도 총리 감투를 받아들이면 국회의 권위를 훼손시킨 대표적인 사례를 두 번이나 남겼다는 오명이 앞으로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정 전 의장만 탓할 일도 아니다. 정 전 의장으로부터 의사봉을 건네받은 문희상 현 의장은 국회 선진화법 도입 이후 처음으로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데 이어 민주주의 게임의 룰인 선거법과 위헌 가능성이 있는 새 수사기구 공수처 신설도 제1 야당을 제쳐 두고 처리하겠다는 태세다. 문 의장이 자기 지역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정권 하수인을 자처하고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대법원장은 대통령 지시를 받들어 전임 대법원장을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직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 발부를 위해 검찰 출신 영장판사를 새로 임명하기도 했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졸(卒)이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직전 집권당 대표였던 5선의 추미애 의원은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받았다. 그래도 집권당 대표 출신들이 자리 하나 준다면 체면과 체통을 다 버린다. 부끄러움을 잃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잃은 나라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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