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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만물상] 1억4000만원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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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미술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 '천년'은 큰 유리 진열장 두 개로 구성돼 있다. 한쪽에는 피 흘리는 소의 잘린 머리가, 다른 쪽엔 커다란 나무 상자가 놓여 있다. 상자엔 구더기가 가득 들어 있어 시간이 지나면 파리들이 죽은 소 머리로 날아간다. 파리들은 진열장 안의 곤충 퇴치기에 걸려 타 죽기도 한다. 소 머리에 달라붙어 있거나 날아다니는 파리들, 죽은 파리들로 진열장이 가득 차는 사이, 소 머리에서는 다시 구더기가 태어난다.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라고 하는 이런 예술은 관객들 반응까지 작품의 일부라고 설명된다. 관객이 파리 떼가 우글대는 소 머리를 보고 구토한다면 작품이 더 '풍성'해지는 셈이다. 1960년대부터 활발해진 이런 사조의 근원은 1917년 소변기를 거꾸로 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인 마르셀 뒤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샹은 물질적 객체가 아닌 '관념'을 작품으로 내세웠고 그 관념에 맞는 기성품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전시조차 거부당했지만 훗날 경매에서 1700만달러(약 200억원)에 팔렸고 '20세기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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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탈리아 설치 미술가가 선보인 '코미디언'이란 작품이 연일 화제를 낳고 있다. 바나나 한 개를 포장 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은 게 작품의 전부다. 이것이 12만달러(약 1억4000만원)에 팔렸다고 해서 뉴스가 됐고, 어떤 행위 예술가가 그 바나나를 먹어버린 뒤 "작품 파괴가 아니라 행위 예술"이라고 해서 또 화제였다. 이젠 유명 배우가 바나나를 이마에 붙이고 사진을 찍거나 다른 과일 회사들이 벽에 과일을 붙인 패러디 광고로도 등장한다.

▶개념 미술은 작가의 생각이나 관념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을 작품으로 실행하는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본다. 어떤 개념 미술 작가들은 아예 작품을 만들지 않고 '작품 만드는 법'을 잡지에 기고하기도 한다. 이번 작품 역시 바나나가 팔린 게 아니라 바나나 설치법이 세세히 적힌 '진품 증서'가 팔린 것이다. 이런 작품은 대개 미술관에서 사들인다고 한다.

▶일상적 소재를 아주 단순하게 설치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게 무슨 예술이냐'는 반응이 나온다. 이런 작품이 오히려 대중을 미술로부터 소외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그런 작품을 보고 한 번에 고개를 끄덕일 만한 관객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작품이 대중적 화제가 되고 패러디까지 등장한 것 자체가 개념 미술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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