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광장 민주주의가 의회 뛰어넘어
청와대 정부 축소시켜야
집단의 공격이 말할 자유 막아
개인 이성적 판단 보장해야
대통령, 삼권분립 헌법 존중 안해
386 집권세력, 민주주의 잘못 이해
조국 사태 때 여당 130명 의원들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움직여
과거엔 언론 통제가 문제였지만
이젠 스스로 말 못하고 자체검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세밑 광화문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하는 상황까지 이른데는 정치적 양극화가 그 중심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개개인의 의견과 이성적 판단이 허용되고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게 변화의 출발“이라고 했다. 변선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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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가 위기다. 의회정치는 사라지고 광장정치만 요란하다. 극단의 목소리를 아우르는 중간지대도 없고, 그걸 키우려는 세력도 없다. “오늘의 정치 현실을 위기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극복돼야 하거나 크게 개선돼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이라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난 건 2020 한국 정치의 돌파구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최 교수의 서울 광화문 개인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증오와 배타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해야 할 일로 최 교수는 “정돈된 공론의 장”과 “협치의 부활”을 꼽았다.
Q : 촛불시위 이후 2017년 책 『양손잡이 민주주의』를 낼 때만 해도 “처음으로 자유로운 정치 공간이 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2년 만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얘기하고 있다. 왜 이렇게 역설적인 상황이 되었나.
A : “문재인 정부가 한국 정치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란 걸 깊이있게 이해하고 정치를 바꿀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만들었으면 대전환의 전기가 될 수도 있었겠다. 한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면서 이것이 위기로 표현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최 교수는 지난달 9일 김대중도서관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그리고 새 정치 질서를 위한 대안’이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당시 그는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가장 심한 박해를 당했고, 수십 년을 망명 속에서 투쟁을 지휘한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가 기억에 남을 말을 했는데, 민주화에 참여하는 모든 정치행위자들이 ‘과거를 파헤치지 않을 것’을 호소했다”고 강조했다. 과거를 파헤치는 건 과거의 갈등을 되풀이하는 것 말고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
Q : 적폐 청산이 문제였나.
A : “촛불시위 이후의 정치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방향 착오’가 적폐청산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 자신도 촛불시위와 박근혜 정부 탄핵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긍정적일 수 있는 전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당정치가 작동할 수 없을 정도로 양극화가 극대화되고 있다. 탄핵 이후 상황을 다루는 과정에서 정당들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탄핵 이후 체제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공동의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였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앞으로 극한적인 정치세력 간 대립이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리지 않을까 지극히 우려스럽다.”
Q : 문 대통령의 취임사는 통합에 비중을 뒀었다. 왜 적폐청산으로 갔다고 보나.
A : “취임사라든지에서 천명된 정부 운영의 방향은 분명히 타협적이었는데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곧 적폐청산으로 180도 전환됐다. 집권의 중심을 이루는 세력들이 이른바 386운동권 출신의 정치엘리트인데 이들의 힘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 사람들의 행위, 발언, 특히 조국 같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써놓은 걸 보면 완전히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정치, 보수진영 세력을 궤멸시키겠다고 하는 의지 같은 게 느껴져서다.”
Q : 집권세력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 안 돼 있다 보니 결국 민주주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문제의식인가.
A : “그렇다. 80년대 당시 교육받은 젊은 세대 학생들이 선봉에 섰기에 한국의 민주화가 이뤄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선 높이 평가해야 한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좋은 제도를 만들고 그걸 통해 좋은 정당 체제를 발전시키고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에 와서 되돌아볼 때 386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이해했던 방식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통치체제, 혹은 정부 형태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를 만들고 정책을 운영하게 하는 정부가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이해방식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뤘던 사람들의 다수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인민의 권력(people’s power)이랄까, 민중의 권력이랄까, 그것의 구현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민주적 정부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공허한 얘기가 된다.”
386 세대교체 무의미, 정당 제 역할해야
Q : 386 집권세력이 권력 내부에서나 혹은 세대를 지나 교체되면 해소될 수 있을까.
A :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촛불 시위 이후 현재 나타나는 현상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비해 직접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되는 경향을 보게 된다. 정당·국회가 민의를 대표하거나 중심이 되기보다 ‘광장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도권 밖 광장에서 분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정당의 역할을 적대적으로 인식토록 한다. 이러한 시민운동적 정치관은 정치가 제도권 밖으로 중심을 옮겨가는 포퓰리즘으로의 길을 닦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방식은 의회와 정당을 우회하거나 뛰어넘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행부 중심의 정치를 대안으로 불러오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보파, 개혁파들의 관점에서는 대통령이야말로 국민의 총의를 대표하고 실현하는 개혁자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권력은 대통령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개혁을 모든 국정운영의 중심에 놓는 것이 가져오는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기본원리로서 삼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을까.”
견제와 균형의 원리 제대로 작동 안돼
최 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문제가 된 게 칩거해서도 비서실, 수석·보좌관들을 통해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인데, 지금 정부도 그런 식으로 하고 있지 않나”라며 “대통령이 사실 엄격히 말하면 (삼권분립 등) 헌법의 규범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국 사태를 보면서 느끼는 건 지금 여당에 130명 가까이 되는 국회의원이 한 사람인 것 같다”는 평가도 했다.
Q : 결과적으로 한국의 중심적 정치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얘기인데.
A :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통치체제(government)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입헌적 또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한다. 사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먼저 인민은 자유주의적 헌법에 힘입어 자유를 획득한다. 기존 정치체제가 군주정이든 권위주의이든 또는 공화정이든 인민은 자유주의적 헌법의 틀 안에서 그들의 권력을 요구하고 획득하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이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인민권력을 실현하는 민주주의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 한국 정치의 양극화이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하는 급진주의적 포퓰리즘이다. 그러는 동안 통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과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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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공격이 말할 자유 막아 … 개인 이성적 판단 보장을”
Q : 권력의 집중이 문제라면 처방은 권력의 분산일 텐데, 현행 헌법에 따라서 분권형 총리 즉 총리는 내치를 대통령은 외치와 국방을 하는 역할 분담을 한다면 이런 부분이 해소될 수 있을까.
A : “총리의 역할 증대라는 틀은 부분적인 답은 될 것 같다. 우리 헌법엔 내각제적 요소가 있다. 제헌헌법을 만들 때도 유진오 박사가 내각제로 성안했다가 미 군정이나,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으로 대통령제로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각제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게 됐다. 내각을 이원집정제적 행태로 운영하는 것은 현행 헌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Q : 양극화된 갈등을 중화시킬 중간지대를 키우려면 어찌해야 한다고 보나.
A : “시민사회가 자율성을 갖고 다원적 구조를 발전시키는 것, 가치의 다원주의랄까 각자 개인의 이성적 판단과 언론의 자유랄까, 이런 게 보장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한 좌담회에 참석했을 때 어느 교수가 ’자체검열‘이란 말을 쓰던 게 인상적이었다. 옛날처럼 언론 통제가 겁나는 게 아니라 집단의 공격이 무서워 스스로 공격받지 않을 얘기를 골라서 한다는 거다. 정치도 공론의 장이 살아나야 하는데, 단발적이고 파편화된 의견 말고 이론·사상적으로 정돈된 의견이나 체계 같은 게 생성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형성돼야 한다. 대충 겪을 거 다 겪고 이래선 안 되겠다고 하는 공감대가 넓어지면 불가능할 이유도 없을 건 같긴 한데….”
최 교수는 책에서 민주주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아담 쉐보르스키를 인용해 민주주의를 ’정부여당이 패배할 수 있는 체제‘라고 했다. 경쟁력에 따라 여야가 수시로 뒤바뀔 수 있는 게 민주주의란 의미다. 문제는 한국의 현 야당이 정부여당을 패배시킬 수 있을 만큼 대안적이고, 민주주의적이냐다.
야당 존립 위협 받으면 광장 뛰쳐나가
Q : 공교롭게도 황교안 대표가 주도하는 제1 야당도 광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다음 정권이 보수로 넘어간다고 해도 보복의 정치가 되풀이되는 양상이 될 듯한 암울한 상황이다. 돌파구는 없나.
A : “보수, 진보 정당 간 갈등의 양극화 현상이란 게 한국 정치의 중심적 특징인데, 거기다 탄핵이 더해지면서 적대감이 더 강화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는 정당 간 경쟁으로, 집권 가능성이 교차적으로 이뤄질 때 작동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다. 집권할 기회가 없는 패자들은 민주주의 체제나 제도에 대해 부정하고 도전하게 된다. 문제는 야당이 존립 자체가 위협받거나, 집권을 기대할 수 없어 사생결단으로 도전하는 상황이 될 때다. 그런 상황에서 원내 소수여서 안 되면 밖으로 나와 투쟁한다. 당장 지금 광장 정치가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 대통령 권한 분산…권력 중심, 내각으로 이양해야
최 교수의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
인터뷰 후 최 교수는 ‘대안에 대해 말한다’는 취지의 e메일을 보내왔다.
① 오늘의 한국 정치를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하는 상황까지 된 데는 정치적 양극화가 그 중심에 있다. 진영 사이의 소통과 대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진영 내 이견과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나는 이를 “동원된 다수의 전제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조건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주의의 근본원리들, 인간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의 표현인 사상과 언론 자유, 그것과 병행하는 가치의 다원주의가 허용될 수는 없다. 시민 개개인은 물론, 이들의 집단 내에서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집단 사이에서 도덕적 자율성에 의거한 개개인의 의견과 이성적 판단이 허용되고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조건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② 한국에서의 정치권력은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준으로 그 정점인 대통령으로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그 처방은 권력의 분산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민주주의는 통치체제(government)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에 기초한 개인 권리에 의해 제한된 ‘제한국가’(limited state)를 구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청와대 정부’를 축소하여 집행부 권력의 중심을, 헌법으로 제도화하고 있는 내각으로 이양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난 사람=박승희 논설위원, 고정애 정치에디터
인터뷰에 장서윤 인턴기자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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