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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르포 | 지금 이란에선]"우리가 솔레이마니다…미국이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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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란 남서부 아흐바즈 국제공항에서 5일(현지시간) 시민들이 미군 공격으로 숨진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특수부대 사령관의 시신이 담긴 관과 사진을 운반하고 있다. 테헤란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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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6일 새벽 6시쯤 아직 어둠이 짙게 갈린 거리이지만 테헤란 대학교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테헤란 시민들은 8시에 열릴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 사령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모였고 손에는 이란 국기와 솔레이마니 사진을 들고 있었다. 대형 붉은 깃발과 노랑 깃발도 보였다. 붉은 깃발은 복수를 상징하고 노랑 깃발은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PMF)와의 연대를 의미한다.

테헤란대학교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한 하산 로하니 대통령, 사법부 수장 에브라힘 라이시, 알리 라리자니 국회의장 등 고위층 대부분이 참석했다. 하메네이는 추모 기도를 하면서 줄곧 눈물을 흘렸고 순식간에 장례식장이 눈물바다로 변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다. 시민들은 “마르그 발르 움메리카”(미국에 죽음을), “엔테검, 엔테검”(복수하라, 복수하라) 같은 구호를 외쳤다. 9시 30분부터 시작된 추모행진에는 수백만 인파가 몰려 거리 전체가 마비됐다. 1979년 이슬람혁명과 198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사망 이후 보기 힘들었던 대규모 인파였다.

알라메타바타바이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쇼자 아흐마드반드는 “서방 세계는 이란 문화를 모른다”면서 “이란과 시아파에는 순교자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추모 행렬 곳곳에 ‘솔레이마니들’이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우리 모두가 솔레이마니”라면서 그의 죽음을 잊지 않고 계승하겠다는 뜻이었다.

시아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제3대 이맘(이슬람 지도자) 후세인의 순교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손자인 후세인은 680년 10월10일(이슬람력 ‘무하람 10일’)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류인 수니파와 후세인을 따르던 시아파가 갈라졌고, 후세인을 추모하는 의식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솔레이마니를 살해함으로써, 슬픔과 패배를 분노와 저항의 동력으로 바꿔온 이란 시아파의 역사에 한겹을 덧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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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왼쪽에서 네번째)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세번째) 등이 6일 테헤란대 교정에서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시신이 안치된 관을 앞에 두고 기도하고 있다. 테헤란 |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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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레이마니는 이란 군부에서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그림자 사령관’이라 불리며 지난 20여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이라크·시리아·예멘 등에서 이란의 중동 내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이란 군부의 실세로 등장했으며, 수많은 승전과 전장에서의 담대한 행동으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지난해 3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그에게 이란 최고의 군사 명예 훈장인 줄피카르(제1대 이맘 알리의 검)를 수여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최초의 줄피카르 훈장이었다.

지난해 11월 휘발유값 인상에 분노한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데에 솔레이마니가 개입했다고 알려지면서 명성에 흠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에 암살당함으로써 흔들리던 명성은 일순간에 회복됐고, 솔레이마니는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가 됐다. 장례식장의 한 시민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이제 ‘21세기 이맘 후세인’이 됐다”라고 했다. 테헤란대 정치학과 교수 다부드 페이라히는 “미국이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솔레이마니의 죽음은 또한 최근 혼란을 겪던 이란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재개되면서 이란 리알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고 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경제난으로 이란 국민들 사이에는 무능한 중도온건파 정부와 대미 강경책을 펴는 보수파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솔레이마니의 죽음이 내부 분열을 덮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테헤란대 정치학과 교수 자한기르 모이니는 “미국이 이란을 하나로 만들었다”면서 다음달 총선을 앞두고 보수·강경파의 입지가 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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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미국과 이란의 갈등을 넘어 이라크 등 중동 국가들의 반미 감정도 증가시켰다. 이라크 의회는 지난 5일 긴급회의에서 미군 철수 결의안을 가결했다. 이라크는 지정학적으로 중동의 중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라크의 미군 공군기지는 중동 내 미국의 군사전략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라크가 미군에게 떠나라고 한 것이다.

중동 국가들도 이번 사안에선 한 목소리로 미국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터키와 시리아는 이번 공습을 비난했으며, 미국의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조차도 미국이 군사행동을 자제하고 중동의 긴장을 누그러뜨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제거작전을 밀어붙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강한 지도자’임을 국내 지지층에 과시했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중동 정책은 심각한 위기에 맞게 됐다. 이번 사건은 중동에서 미국의 설 자리가 한층 줄어들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테헤란 | 유달승 한국외대 이란어과 교수(알라메타바타바이대 정치학과 교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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