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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김향미의 ‘찬찬히 본 세계’]이라크·이란·미국의 얽히고설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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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바그다드 타흐리르 광장에서 8일(현지시간) 시위대 2명이 ‘이라크’라는 아랍어 글자가 그려진 벽화 앞에 앉아 있다. 바그다드|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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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이 이라크 땅에서 무력 공방을 벌인 사이, 이라크 국내 정치적 갈등이 극화하고 무력한 정부를 지켜본 국민들은 다시 한 번 실망했다.

미국은 지난 3일(현지시간)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드론 공습으로 살해했다. 이라크 내 친이란계 무장조직인 인민동원군(PMF)의 아부 마흐디 알무한디스 부사령관도 살해됐다. 이란은 보복조치로 지난 8일 이라크 내 미군기지 2곳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24살의 이라크인 라이얀 자프는 8일 알자지라에 “미국이 이라크 땅에서 솔레이마니를 죽였고 마찬가지로 이란은 이라크 땅에 미사일을 쐈다”면서 “둘다 이라크 주권을 침해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거의 침묵했다”고 했다.

물론 ‘침묵’한 채로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바르함 살리 이라크 대통령은 이란의 미군기지 미사일 공격이 일어난 8일 성명을 내고 “이라크 주권을 침해하는 폭력이 반복되면서 이라크는 호전적인 정당들 간의 대립을 위한 전쟁터로 변했다”고 했다. 아딜 압둘 마흐디 총리도 “이라크는 주권을 위반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우리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격을 규탄한다”면서 “이라크는 외세의 전쟁터, 공격을 수행하는 통로, 이웃 국가를 해치는 장으로 이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라크인들은 미국과 이란이 이라크에서 공격을 주고받은 것에 크게 분노하고 있다고 알자지라가 9일 보도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이라크 주권 침해’를 규탄하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한 것은 이러한 국민 정서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친이란 대 반이란, 갈라진 이라크

미국이 솔레이마니를 살해한 직후 이라크 안에서는 친이란 세력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난 5일 이라크 의회에선 민족주의 성향의 정파와 친이란 시아파 정파가 주도해 미군 철수 결의안을 가결했다. 당시 수니파와 쿠르드계열 의원들은 퇴장한 상태였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시아파 출신의 암마르 알시블리 의원은 로이터 통신에 “다에시(IS의 아랍어식 약자)가 소탕된 마당에 미군 주둔이 더는 필요없다”라며 “우리는 자주국방할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한 나라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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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나자프에서 8일(현지시간) 미군 공습으로 숨진 이라크 내 친이란계 무장조직인 인민동원군(PMF)의 아부 마흐디 알무한디스 부사령관 장례식에서 시민들이 추모하고 있다. 나자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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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시민들이 8일(현지시간)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사진 주변에 촛불을 올려 놓고 추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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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부패 청산, 경제난 해결 등을 요구하며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군경의 유혈진압으로 450명이 숨지기도 했으나, 시위대는 총리와 대통령의 사표까지 받아냈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이란의 내정간섭을 정부 무능의 원인으로 보고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이란이 후원하는 시아파 정권에선 관료들의 부정부패만 심해졌을 뿐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나자프 주재 이란 영사관을 방화하는 등 시위대의 반이란 감정은 고조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 카타이브 헤즈볼라 군시설을 공습하고 솔레이마니까지 제거하자, 반미 여론이 높아졌다. ‘반이란’ 정서가 수그러들어 시위를 이어나갈 동력이 떨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앞서 5일 로이터 통신은 “솔레이마니를 반대하는 이라크인마저 미국이 이라크 영토에서 두 요인을 살해함으로써 이라크가 더 큰 군사충돌에 휘말린다면서 분노한다”라고 전했다.

이라크 총리 사퇴 발표에도 멈추지 않는 반정부 시위,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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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라크 시민이 지난해 11월3일(현지시간) 중부 시아파 성지도시 카발라의 이란 영사관에서 반정부 시위 도중 담장에 올라가 이라크 국기를 흔들고 있다, 카발라|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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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공습하자 반이란 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그다드 타흐리르 광장에 나온 시위대 무스타파 이브라힘(28)은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두고 알자지라에 “다른 나라라면 더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다. 이라크가 이란에 종속돼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아파 민병대(PMF) 소속인 암 알 타미니는 “우리는 솔레이마니와 알무한디스의 복수를 해야 한다”면서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두둔했다.

이라크의 영향력 있는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는 8일 미국과 이란의 갈등 봉합 국면에서 이라크 민병대에 공격을 자체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이라크의 각 민병대는 신중해야 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군사행동을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미·이란 갈등에 무기력한 이라크

앞서 이라크 정부는 지난달 29일 미군이 이라크 내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의 군사시설을 전투기로 폭격했을 때 주권 침해라고 항의했다. 당시 압둘 마흐디 총리는 미국으로부터 공격 정보를 사전에 듣고 “작전 직전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에게 폭격하지 말라고 했는데 미국이 강행했다”고 말했다. 이라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군사조치를 취한 것이어서 이라크인을 죽이는 미국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라크의 처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였다.

이라크 의회가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했지만 실효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의회의 결의안을 두고 “이라크가 미군 철수를 요구한다면 이전까지 보지 못한 수준의 제재를 가할 것이다. 이란에 가한 제재는 약과라고 보이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맹국’ 이라크에 내놓은 거친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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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이란 미사일 공격 이후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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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트 대통령은 이란의 미사일 공격 후 8일 백악관에서 한 연설에서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숨진 이라크인이 없다는 점에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는 이라크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미 국가안보 부보좌관 출신 메건 오설리번 하버드대 케니디스쿨 교수는 블룸버그 통신에 “(트럼프 연설은) 미국인, 이란인, 유럽인에게는 반가운 내용이었다. 이번 연설의 청중 중 가장 실망한 쪽은 이라크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이라크에는 미군 약 5200명이 12개 군기지에 분산해 주둔한다. 이들은 이슬람국가(IS) 잔당을 격퇴하고 이라크군을 훈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라크·이란·미국의 얽히고설킨 역사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2위 산유국이다. 하지만 기존 정치권의 심한 정쟁, 관료의 부패로 통치 체제가 허약하고 지리적으로 중동의 중심으로 외세의 영향을 크게 받는 나라다. 국경을 면하고 있는 이란과는 1930년대부터 샤트 알 아랍 수로, 호르무즈 해협 섬 등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오래 갈등했다. 이란은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 이후 혁명 이데올로기를 중동 지역에 확산하고자 했다. 인접국 이라크는 당시 세속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사담 후세인이 집권했는데, 호메이니 정권은 후세인을 비난했다. 후세인은 알 아랍 수로의 영유권 등의 문제를 이유로 이란을 침공했다. 양국은 8년간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이라크·이란 전쟁 당시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다.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은 이라크 편에 섰다. 미군은 이 기간 이란 군함과 유조선을 폭파했고, 후세인 정권에 무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2003년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해 사용하고 국민 인권을 유린한다는 명분을 들어 이라크를 침공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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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2011)|위키피디아


이란과 미국의 악연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3년 미 중앙정보국(CIA)은 석유자원 국유화를 추진한 모하마드 모사데그 정권을 전복한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후로는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한 팔레비 왕조를 지원하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반미노선으로 바뀌었고, 1979년 11월4일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점거·인질 사건으로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이듬해 4월 미국과 이란은 단교했다. 이라크·이란 전쟁 마지막 해 이라크를 지원하던 미국 군함이 이란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격추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란 대통령, 트럼프에…“미 대사관 인질 52명? 미군에 격추된 290명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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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1월25일 주이란 미국 대사관에서 인질로 억류됐던 미국인들이 풀려나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다. |미 국방부·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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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96년 8월 이란과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분류, 이들 국가의 원유와 가스 개발 투자를 금지하는 경제 제재에 착수했다. 2003년 이란의 핵기술 개발이 알려지자 미국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한 이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총력 저지에 나섰고, 2006∼2008년 이란 핵 제재 유엔 결의안을 여러 차례 통과시켰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에는 관계가 좋아지기도 했다. 2015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은 이란과 핵 합의를 맺었고, 대이란 투자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후 핵 합의 파기, 이란 제재 복원, 이란 혁명수비대 테러 집단 지정 등 강경 조치에 들어갔다. 이란은 핵 활동 재개 준비와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경고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해 말 이라크 미군기지에 대한 로켓포 공격→미군의 이라크 내 친이란 시아파 민병대 군사시설 공습→친이란 시아파 민병대의 이라크 주재 미 대사관 공격 등이 이어지며 위기감이 높아졌다. 새해 솔레이마니의 제거, 이란의 보복 공격으로 이어졌다. 최근의 공방이 벌어진 무대는 모두 이라크였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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