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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분수대] 경제 희망고문, 민심 어장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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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사귀지는 않지만 이성에게 접근했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상대가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일컫는 연애 용어가 ‘어장 관리’다. 떡밥만 던지며 이성을 관리하는 걸 말한다.

어장 관리의 필수는 어정쩡한 태도다. 상대가 오해하거나, 미련을 버리고 딱 자르지 못하게 여지를 주는 것이다. 이른바 ‘희망고문’이다. 가수 박진영이 1999년 내놓은 수필집 『미안해』에 실린 글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애매한 태도로 희망을 주고,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해 상대를 고통스럽게 한다며 ‘희망 고문’이라고 표현했다.

희망고문의 원조는 프랑스 작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1883년에 쓴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이란 소설이다. 고리대금 혐의로 지하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유대교 랍비 앞에 화형식 전날 종교재판관이 나타난다. 마지막 밤이라도 편히 지내라며 쇠사슬을 풀어주고 재판관이 떠난 뒤, 감옥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랍비. 탈옥을 꿈꾸며 혼신의 힘을 다해 감옥을 빠져나온 그의 눈앞에 재판관이 서 있었다. 희망이란 이름으로 가해진 마지막 고문인 셈이다.

한국 경제에 대한 희망고문은 진행형이다. 지난 6일 민주당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이해찬 대표는 “(경제가) 저점은 통과했는데 반등 속도는 매우 느려 국민이 체감을 못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지난 11일 국무위원 워크숍에서 “올해는 경제가 반등하고 도약하는 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년간 소득주도성장이란 장밋빛 구호로 희망고문을 해왔지만 성과 없이 빛만 바랬다. 이제 희망고문의 바통은 바닥을 쳤으니 반등할 일만 남았다는 ‘저점론’이 이어받는 모양새다. 지난해 10월 OECD 경기선행지수가 22개월 만에 반등하며 희망의 불씨를 댕겼다. 그럼에도 KDI는 10개월째 한국 경제가 “부진”하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경기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횡보 중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저점론을 앞세운 ‘민심 어장 관리용’ 경제 희망고문은 풀 가동 중이다. 하지만 더블딥(일시적 반등 이후 재침체), 혹은 바닥을 친 뒤 회복되지 않는 ‘L자형’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꽃으로 때려도 아프다는 데, 희망으로 때려도 고문은 고문이다. 고문의 후유증은 사람이나 경제나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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