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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출발을 향한 몸부림…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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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연출 신작 ‘겨울은 춥고 봄은 멀다’ / 2019년 초연 ‘여름은 덥고…’와 궤를 이어 / 계절 연작 시리즈의 2부작으로 평가 받아 / 사연 많은 가족의 ‘파국 속 희망’ 주목

세계일보

화장기 없는 맨 얼굴 같은 배우들 연기로 남루한 삶과 인생의 잔혹한 내면을 비춰주는 박근형 연출의 신작 ‘겨울은 춥고 봄은 멀다’. 제사 도중 어머니(강지은)가 갑자기 가족 비밀로 감춰져 온 과거 얘기를 꺼내고 있다. 극단 골목길 제공


연극 ‘겨울은 춥고 봄은 멀다’는 1999년 ‘청춘예찬’ 이후 줄곧 연극계에 큰 영향을 준 스타 연출가 박근형의 신작이다. 강렬한 현장감을 만들어내는 간소한 무대와 벽돌, 통조림 캔, 십자가에 걸린 듯한 외투와 신위와 같은 상징적 소품 등 그의 연극이 지니는 DNA를 고스란히 지녔다. 남루한 삶과 인생, 전쟁과 아버지의 부재, 뒤틀린 가족사, 인간의 부조리와 삼류인생 등 ‘박근형 연극’의 주요 요소도 모두 들어가 있다. 배우들은 이를 꾸미지 않는 자신 모습 그대로의 연기와 양식화된 연기를 섞어 무대에 선보인다.

역시 지난해 초연된 전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와 궤를 함께하는 계절 연작 시리즈의 2부작쯤이 될 이번 작품은 더 어둡고 더 절망적이다. 언제 어디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다만 전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것으로 여겨지는 변두리를 배경으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와 변변치 않은 삶을 이어가는 세 아들, 이들을 건사하는 삼촌과 아들, 모두 여섯 명인 가족이 주인공이다.

전쟁을 맨몸으로 겪으며 자수성가했던 형은 ‘함정’에 빠져 불운하게 죽었다. 이후 아내와 세 아들은 작은아버지에게 의탁해 곤궁한 삶을 이어간다. 삼촌의 아내는 종적을 알 수 없으며 그 아들은 친구들과 벽돌로 ‘퍽치기’를 하며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은 형 기일에 병석에 누워 저주만을 퍼부으며 산송장처럼 지내던 형수가 갑자기 기력을 차리고 거실로 나온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기이한 형태로 동거해 온 가족의 위태로운 과거가 하나둘씩 드러난다.

큰아들은 술에 빠져 폐인처럼 지내며 유일하게 하는 일이 습작소설 끄적이기다. 긴장관계인 삼촌 아들과는 자신의 소설이 ‘블랙코미디’인지 ‘비극’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한다. 비극의 행간에 블랙코미디가 숨어 있다는 주장은 이 작품 자체를 놓고 하는 말로 들린다. 스스로 “사람 구실 못한다”고 자책하며 자신의 현재를 지배하는 과거 기억 찾기에 집착하는 큰아들 모습에선 ‘햄릿’도 찾아보게 된다. 주술 같은 제사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끝나자 큰아들은 삼촌과 어머니에게 과거를 캐묻고 결국 진실을 듣게 된다.

제목처럼 봄은 아득히 먼 추운 겨울 어느 날 밤, 사연 많은 한 가족의 파국을 보는 심경은 편치 않으나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한겨울 피어난 작은 꽃씨’처럼 한 가닥 희망을 품게 해준다. “기억해야 한다. 기억해야 새로워질 수 있다. 사느라 애쓴다.” 과거에 정면으로 맞선 후에야 비로소 그 평가와 반성을 통해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작가가 현재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들린다.

강지은, 김정호, 이원재, 이호열, 김병건 등 박근형 연출이 오랫동안 이끌어온 극단 골목길 배우들은 이번 무대에서도 골목길만의 연기를 보여줬다. 박근형 연출은 배우들의 개성을 캐릭터 창조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배우들의 즉흥성과 창조성을 끌어내 서사와 장면, 신체 연기를 완성해 가는 수행적인 연극 만들기 방식으로 정평 나 있다. 서울 대학로 아트원 씨어터 3관에서 23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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