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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다크룸’ 한국판 펴낸 수전 팔루디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마초적 가부장’…본모습 뒤늦게 깨달아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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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퓰리처상 수상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의 기억 속 아버지는 “여자들을 깔보다 못해 가끔은 혐오하는 것 같았”던 마초적 남성(왼쪽 사진)이었다. 그가 10대 시절 떠난 아버지가 2004년 보낸 e메일 속 사진에서는 치마를 입은 여성(오른쪽)이었다. 아버지는 76세에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이제 스티븐 팔루디가 아닌 스테파니 팔루디였다. 아르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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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수전 팔루디(61)라는 이름을 알린 책은 2017년 번역된 <백래시>(아르테)다. 미국에서 1991년 출간된 책이 26년이란 시차를 두고 나왔지만 당시 한국 상황과 맞물리며 큰 호응을 받았다.

76세에 트랜스젠더된 부친

반전의 삶을 행적 따라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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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팔루디는 이후에도 <스티프트>(1999), <테러 드림>(2007)이란 이른바 ‘팔루디 연작’을 썼다. 2016년에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다크룸(In The Darkroom)>을 내놓았고, 이 책은 2017년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최근 한국에도 번역된 <다크룸>(아르테)은 ‘페미니즘’이란 큰 틀 안에 있지만, 그 결은 많이 다르다. 우선 소재가 파격적이다. 책은 2004년 7월7일 수전 팔루디가 아버지에게 e메일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수전 팔루디가 10대인 시절 어머니와 이혼하고 떠난 아버지는 e메일에 자신의 변한 모습을 사진으로 첨부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76세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성이 됐다. 이름도 스티븐에서 스테파니로 바꿨다.

수전 팔루디의 기억 속 아버지는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전형적 가부장’이었다. 그러나 수십년 만에 본 사진 속 아버지는 그 사람이 아니었다. 수전 팔루디는 이 극적인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가 있는 헝가리로 떠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기록’해 <다크룸>을 쓴다.

<다크룸> 한국판을 출간한 아르테의 도움을 받아 지난 13일 수전 팔루디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먼저 ‘아버지의 성전환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정’을 물었다. 수전 팔루디는 “아버지는 호전적이고, 공격적이고, 화가 많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며 “여자들을 깔보다 못해 가끔은 혐오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라 단정지어 놓고, 아버지의 본모습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의 ‘변신’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헝가리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이슈트반 프리드먼이었다. 아버지는 헝가리의 민족동화 정책에 경도돼 18살에 ‘가장 헝가리 민족다운’ 성 ‘팔루디’로 개명한다. 그리고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간 뒤에는 ‘스티븐 팔루디’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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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팔루디. 아르테 제공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경험들이 합쳐져서

아버지의 정체성이 된 것”


수전 팔루디는 “이 책(다크룸)을 쓰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정체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라며 “모든 경험들이 합쳐져서 아버지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책의 핵심 질문은 정체성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인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라며 “사실은 둘 다이다. 우리는 물려받은 것을 재구성하는 순간에도 물려받은 것으로 정체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다크룸>에서 놀라운 대목 중 하나는 ‘페미니스트’인 수전 팔루디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수전 팔루디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만난 아버지가 카트에 핸드백을 걸어놓은 것을 보고 “어떤 여자도 저렇게는 안 해”라고 생각한다. 수전 팔루디는 “여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여성성’에 대한 진부하고 오래된 생각에 사로잡혀 제대로 검열해보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라며 “내게도 그런 편견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조사하면서 얻은 뜻하지 않은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수전 팔루디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와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전 팔루디는 “어찌 보면 내가 저널리스트였기 때문에 아버지와 다시 연락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가 극히 까다로운 분이라서 극히 호전적으로 나올 수도 있었지만, 난 저널리스트라는 껍질을 쓴 덕에 아버지의 분노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크룸> 말미에 수전 팔루디는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분법은 ‘삶과 죽음’뿐이다.” <다크룸>을 넘어서 수전 팔루디의 모든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수전 팔루디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자질로 여겨지는 우리 존재에 관한 많은 것들이 사실 훨씬 더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이 내 요지”라며 “우리는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생각하지만 전적으로 남성이나 여성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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