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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Venice in ‘카사노바 Casanova’…“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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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Venice, 이탈리아어로 베네치아Venezia는 수백 년간 자치권을 행사한 베네치아공화국의 수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베니스 출신의 한 유명인이 있다. 어쩌면 이 남성은 ‘가장 베니스다운 인물’이겠다. 18세기, 베니스가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피우던 때 태어난 그는 베니스가 수세기 동안 누린 풍요, 향락, 종교, 문화, 예술 등 이른바 세속의 모든 것을 향유했다. 바로 ‘카사노바Casanov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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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복이자

가장 아름다운 수상 도시

이탈리아 북부 아드리아해에 면한 베니스. 이탈리아 전체가 그렇듯 베니스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신성한 종교와 탐미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한 도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의 시기라 일컫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물과 정신의 수혜자이며, 신화와 실재가 병존한 시대를 관통했던 인물과 사건이 이 도시에 깃들어 있다. 하지만 베니스라고 축복만 받고 탄생한 ‘금수저 도시’는 아니다. 도시 태생의 서사가 전쟁과 자연의 도전에 정면으로 부딪혀 온 인간의 피나는 응전이듯 베니스는 아직도 자연이라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인과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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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23일, 베니스는 물난리를 겪었다. 이날 저녁 베니스 주변 수위가 무려 160㎝까지 올라간 것. 이 정도면 베니스의 70%가 물에 잠기는 수준이다. 베니스의 상징인 산마르코광장을 비롯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베니스의 대부분 문화재들은 침수 위험에 노출되었다. 곧 도시 광장은 폐쇄되었으며 학교를 비롯해 모든 기관과 시설의 문은 닫혔고 베니스를 찾은 관광객들은 지겹도록 물이 가득한 베니스를 감상해야 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스에 ‘국가 비상 상태’를 선포했고 긴급 예산을 투입해 물을 막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베니스는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 변화로 1년에 2~3㎜씩 점점 가라앉고 있다. 언젠가 우리는 곤돌라가 아닌 잠수함을 타고 수상 도시가 아닌 ‘해저 도시’ 베니스를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베니스를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 ‘가면의 도시’ 등으로 부르며 중세부터 그 아름다움을 축복해 왔다. 베니스는 110여 개의 섬이 400여 개 다리로 연결된, 한마디로 물에 떠 있는 도시다. 도시는 수상 위의 구시가지와 육지에 있는 신거주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는 약 27만 명이다. 도시의 이름인 베네치아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로마 시대부터 해안을 부르는 단어였다. 또한 이곳에 원래 거주하던 베네티인들의 이름을 따 베네치아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사랑’과 ‘매혹’을 뜻하는 인도 유럽어인 ‘베네티’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어떤 것이든 베니스는 원래부터 ‘물’, ‘아름다움’, ‘사랑’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역사적으로 베니스의 탄생은 로마 제국의 멸망에서 비롯된다. 훈족의 침입을 피해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거주하던 로마인들이 베니스에 정착했다. 이후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자 베니스는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과의 지리적 여건 그리고 정치 종교적 문제로 베니스는 동로마 황제의 지배보다는 도시민의 자치권을 강화하며 도시의 세를 키웠다. 동로마 제국은 총독을 파견했지만 베니스인들은 도시민 10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것을 결정했고, 오히려 파견된 총독들은 베니스인들의 눈치를 보거나 심지어 유배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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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들어 베니스는 부흥을 시작했다. 십자군전쟁이 그 단초였다. 유럽에서 중동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베니스는 무역과 금융 그리고 십자군 부대의 중간 기착지 및 보급 창고로서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수백 년간 지속된 전쟁의 군수 기지로서 또 동로마 제국, 중동, 인도 등과의 무역에서 베니스는 중계상 역할을 담당해 부를 축적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는 런던도 파리도 아닌 베니스였다. 즉 13세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 베니스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13세기 후반 베니스는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 많은 약 3만 척의 배를 소유했고, 베니스를 지배하는 귀족 가문들은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과 성 그리고 성당’을 경쟁적으로 지었다. 또한 예술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아 당시 베니스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귀족 가문의 후원으로 인류 문화 유산이 될 걸작들을 만들어 냈다. 베니스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로 우리는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를 손꼽는다. 1678년 베니스에서 태어난 비발디는 ‘붉은 머리의 사제’로 불리는 성직자이자 작곡가였다. 그의 불멸의 곡 ‘사계’는 4대의 바이올린으로 이루어진 협주곡으로 그동안 귀족과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음악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베니스는 점점 쇠락을 길을 걸었고 결국 오스트리아에 합병된다. 베네치아는 1866년 이탈리아가 통일 전쟁을 완성하며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

여기 베니스 출신의 한 유명 인물이 있다. 어쩌면 이 남성은 ‘가장 베니스다운 인물’이겠다. 18세기, 베니스가 그 마지막 화려한 불꽃을 피우던 시기에 태어난 그는 베니스가 수세기 동안 누렸던 풍요, 향락, 종교, 문화, 예술 등 이른바 세속적인 모든 것을 향유했다. 바로 ‘자코모 조반니 카사노바 Giacomo Giovanni Casanova’다. 우리가 흔히 ‘희대의 바람둥이’, ‘호색한’ 정도로 알고 있는 카사노바다. 그는 그가 쓴 책 『나의 인생 이야기 History Of My Life』의 첫머리에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일이 설령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여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있다. 라세 할스트롬 감독이 히스 레저, 시에나 밀러, 제러미 아이언스, 올리버 플랫 등을 기용해 만든 2005년 작 ‘카사노바’다. 영화는 얼핏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한 인간에 관한 경험담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 외에도 카사노바가 ‘활약’했던 그 시대 베니스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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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에 경험한 초자연의 힘, 카사노바 다시 태어나다

1725년 베니스의 산사무엘라극장 근처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자에타노 주세페 카사노바는 배우였고 어머니 자네타는 유명한 성악가로 오페라 무대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이 아닌 그저 ‘유명한 시민’이었다. 6남매의 장남인 카사노바는 병약했다. 매일 코피를 흘렸고 심지어 8살이 될 때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년의 대부분을 순회 공연으로 보내던 부모는 카사노바를 돌볼 수가 없었다. 카사노바의 아버지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결국 카사노바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카사노바의 가족들은 카사노바를 육체적 결함을 가진 정신 지체아로 여겼다. 어느 날 외할머니는 카사노바를 유명한 점술가에게 데려갔다. 점술가는 카사노바의 옷을 모두 벗기고 그의 몸에 향유를 발랐다. 그리고 카사노바를 상자 안에 넣고 주문을 외웠다. 카사노바는 좁고 어두운 상자 안에서 공포에 휩싸였지만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카사노바는 잠이 들었다. 카사노바는 꿈을 꾸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카사노바에게 다가왔다. 혼령은 아름다운 눈으로 카사노바를 한참 바라본 후 카사노바에게 입을 맞추었다. 혼령의 기운이 입맞춤을 통해 카사노바에게 들어갔다.

다음날, 매일 흐르던 코피는 멈추고 그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카사노바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변화가 카사노바에게 일어난 것이다. 카사노바는 이를 기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가족들은 기도를 올렸고 카사노바는 이후 초자연적 현상에 심취했다.

카사노바는 기숙 학교에 입학했다. 카사노바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수많은 책을 읽은 그는 수학, 과학, 역사, 언어, 철학, 예술은 물론 펜싱과 체육에도 능했다. 또한 어렸을 때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믿기질 않을 만큼 재치 있는 언어를 구사하며 능숙한 화술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즐겁게 만드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카사노바는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카사노바는 12살이 되었다. 앞날을 선택할 시기가 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시민이 출세하려면 성직자나 군인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카사노바는 성직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부와 명예를 보장해 주는 유일한 사다리였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파도바대학에 입학, 로마법과 교회법을 전공한다. 카사노바는 성직자 말리피에로의 도움으로 1740년 성직에 입문하고 베니스의 코레 대주교에게서 서품을 받는다. 또한 그는 15세에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이듬해 비잔틴성당에서 신학 강의를 하며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는 등 전도유망한 성직자가 된다. 카사노바는 17살에 파도바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출셋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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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사노바에게 교회법 강의는 따분할 따름이었다. 카사노바가 ‘나는 성직자와 맞지 않구나’라고 느끼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첫 연애도 경험한다. 하지만 상대인 루시아는 카사노바가 성직자임을 알고 둘의 관계에 선을 긋는다. 카사노바는 이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녀와 헤어진 뒤 카사노바는 루시아가 바람둥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받는다. 그리고 사랑에 관한 자신만의 원칙을 세운다. 앞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고. 또 여성과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여성만이 아닌 다른 여성과도 잘 지내야 한다고. 이 깨달음은 훗날 카사노바가 바람둥이로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연애관의 기본이 된다. 또한 카사노바는 당시 그를 가르치던 성직자들의 스캔들을 직접 보게 된다. 훗날 카사노바는 이때를 ‘로마로 가서 성직자로 자리 잡기 위한 절차를 밟다가 운명의 꼬임으로 그 길을 포기했다’고 적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성직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카사노바는 결국 성직자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들, 구름 위로 몸을 떠오르게 하는 마약 같은 술에 푹 빠져든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충이 있었다. 그것은 돈이었다. 그는 소극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으로 겨우 돈 몇 푼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돈이 있어야 연애도 하는 법. 카사노바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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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처럼 찾아온 행운, 베니스 최고 귀족의 양자가 되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환락가인 베니스에서 돈이 없는 카사노바는 매일 행운을 잡는 꿈을 꾼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정말 꿈 같은 행운이 닥친다. 그날도 바이올린 연주를 마치고 곤돌라를 타고 가던 카사노바. 마침 그 곤돌라에는 베니스의 유명한 귀족이자 부자이며 시의원인 마테오 브라가딘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베니스의 물을 가르며 미끄러지던 곤돌라가 돌연 멈추었다. 마테오 브라가딘에게 갑자기 뇌졸중이 온 것이다. 카사노바는 순간 생각했다. ‘그래. 이건 하늘이 내게 준 행운이다.’ 카사노바는 마테오 브라가딘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 꼬박 이틀 동안 병간호를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주술적 힘까지 동원해 브라가딘을 돌본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브라가딘은 기적처럼 회복했다. 브라가딘은 젊고 잘생긴 카사노바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나를 치료했는가?”

“초자연적인, 즉 심령의 힘으로 경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브라가딘은 결국 그를 양자로 맞이했다. 카사노바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카사노바는 베니스에게 가장 돈 많고 권력 강한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카사노바는 베니스 사교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베니스 사교계의 모든 여성은 단박에 카사노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의 주무대는 궁정의 홀과 은은한 침실이었다. 그는 낮에는 도박, 밤에는 수많은 여성과의 쾌락에 몰두했다. 물론 그 쾌락과 일탈에는 카사노바만의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여성을 만나 사랑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감동을 주어야 한다. 여성들을 진정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순간의 쾌락은 불결한 행동이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만난 시간과 상관없는 것이다.”

물론 카사노바가 베니스 사교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귀족 가문의 양아들이라는 신분도 주요했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남들과 차별되는 ‘다름’이 있었다.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가 가진 주무기는 박식함과 달변이었다. 카사노바는 17세에 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로 법학, 신학, 문학, 예술, 과학, 정치, 경제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언어에서는 거의 천재였다. 귀족의 상징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히브리어까지 능통했다. 춤 또한 능숙했고 펜싱, 승마 등 그야말로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하지만 카사노바를 진정으로 빛낸 것은 그가 어떤 여성을 만나 한순간 사랑하더라도 진정을 다했고 상대 역시 카사노바의 진정성을 느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한 번 본 사람은 잊지 않았고 심지어 당시 상황과 대화와 행동도 기억할 정도였다고 한다. 흔히 쓰는 말로 ‘바람 피울 수 있는 능력 중 으뜸은 기억력’이라고 한다. 즉 여러 여성과 동시에 교제할 수 있는 능력, 그것도 ‘진정성을 주면서’라는 조건에 카사노바는 그야말로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그러면서도 카사노바는 여성과의 관계에 있어 ‘쿨’했다. 그는 “나를 떠나 더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에 보내 준다”며 이별에도 깔끔했다.

귀족이나 부잣집 남성과 약혼한 여성들이 당시 카사노바와 사귀면서 파혼이 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카사노바는 오리렛을 만난다. 카사노바는 오리렛의 미모보다 그녀의 영리함에 반한다. 카사노바답지 않게 그녀와의 섹스보다 이야기에 더 열중한다. 훗날 오리렛은 카사노바를 떠난다. 그리고 말한다. “카사노바, 나를 찾지 마세요.” 카사노바는 상처를 받는다. 오리렛은 ‘여성 카사노바’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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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1753년 카사노바는 수녀, 프랑스 대사의 정부, 귀족의 딸, 성직자의 부인, 재판관의 애인 등 가리지 않고 만나 사랑한다. 심지어 프랑스 대사의 정부를 만날 때는 카사노바와 연인, 프랑스 대사와 그의 연인까지 묘한 4각 관계를 벌인다. 이러한 카사노바의 ‘활동’에 베니스 종교 재판소가 주목한다. 여성 때문에 카사노바와 대척점에 선 수많은 남성은 카사노바를 질투하고 음해한다. 1755년 카사노바는 이단 마법을 행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종교 재판관은 카사노바를 국가 기밀을 프랑스 대사에게 누설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카사노바는 금서를 읽었다는 죄목으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카사노바는 베니스 두칼레궁전의 피옴비 감옥에 갇힌다. 카사노바는 억울하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 종교 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카사노바는 탈출을 계획한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서 쇠막대를 구해 매일 쇠막대를 뾰족하게 간다. 그리고 1756년 11월, 한 수도승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한다. 감옥 지붕 위로 올라가 ‘탄식의 다리’를 건너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말한다.

“나는 아름다운 운하를 바라보았다.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낸 잔인한 밤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난날 내게 호의적이던 많은 행복한 사건들 덕분에 나의 감정이 나의 자애로운 신에 이르는 감사의 소리가 되었다.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카사노바는 파리로 간다. 파리는 카사노바에 열광한다. 그는 베니스에서의 향락과 감옥 탈출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여성들은 카사노바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카사노바는 파리에서 루이 15세를 만난다. 그리고 루이 15세에게 획기적인 사업을 제안한다. 그것은 복권 판매다. 카사노바는 국왕에게 “복권 판매로 국가는 세금을, 국민들에게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한다. 루이 15세는 이를 허락하고 카사노바는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다. 그리고 귀족 듀퍼레를 만난다. 카사노바는 그녀에게 초자연적인 마법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고 후원을 받는다. 카사노바에게 파리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하지만 듀퍼레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듀퍼레는 카사노바에게 빨리 마법의 힘을 보여 달라고 재촉했다. 할 수 없이 카사노바는 자리를 마련해 부활 의식을 행하지만 듀퍼레는 단박에 카사노바의 사기를 알아챈다. 듀퍼레는 그날로 후원을 끊는다. 그동안 흥청망청 돈을 쓰며 파리의 환락가를 누비던 카사노바는 졸지에 거지꼴로 방황하기 시작한다. 1766년 42세의 카사노바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지만 곧 추방 당한다. 국제 미아가 된 카사노바는 결국 베니스로 가기 위해 종교 재판소에 탄원서를 낸다. 종교 재판소는 조건을 단 채 카사노바의 귀환을 허락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 되라는 것. 카사노바는 이를 수락한다. 베니스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책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 여전히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만 그의 명성은 예전만 못하다. 더구나 종교 재판소는 카사노바가 ‘스파이 역할에 충실치 못하다’는 이유로 그를 파면한다.

카사노바는 빚만 늘어난다. 이제 베니스에서 그를 찾는 사람은 빚쟁이들뿐이다. 결국 카사노바는 빚에 시달린 끝에 체코의 보헤미아로 도망간다. 그의 나이 60세다. 그곳에서 카사노바는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움으로 도서관에 취직한다. 병들고 늙은 카사노바. 그는 도서관에서 자신의 일생을 정리한다. 시와 소설을 쓰고 42권의 논문도 쓴다. 그리고 총 12권의 자서전을 쓴다. 그 유명한 『나의 인생 이야기 History Of My Life』다. 1798년 카사노바는 보헤미아의 둑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73세다. 부와 명성 그리고 사랑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희대의 사랑꾼’의 말로치고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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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카니발, 그 순간 도시의 모든 것은 가려진다

카사노바는 그저 바람둥이가 아니었다. 그는 성직자, 작가, 시인, 번역가, 간첩, 도박꾼, 사업가였다. 한 인간이 이처럼 다양한 모습의 삶과 재주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카사노바는 분명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여성을 위하여 태어났다는 사명으로 늘 사랑하였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고. 그의 이러한 생각이 잘 녹아 든 기록이 있다. 바로 카사노바의 자서전이다. 그가 죽고 얼마 후 『생갈의 J. 카사노바 회고록 Memoires de J. Casanova de Seingalt』로 출간되었지만 여성들과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금서가 되었다. 이후 1960년 『나의 인생 이야기 History Of My Life』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은 당대의 베니스뿐 아니라 유럽 사회의 관습과 예술, 문화, 종교 등에 관한 살아 있는 생생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카사노바는 책의 머리말에 ‘나는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일이 설령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고 적었다. 시대를 초월해 자유를 만끽했던 진정한 자유인이던 카사노바. 물론 그의 행동에서 호색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만 어쩌면 카사노바는 천부 인권론적 사고, 즉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 권리인 감정과 표현 그리고 행동의 자유를 실천했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인 것이다.

베니스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있다. 바로 카니발이다. 베니스 카니발은 브라질 리우 카니발, 프랑스 니스 카니발과 함께 현재 세계 3대 카니발에 꼽힌다. 카니발의 어원은 ‘고기와 금식’이다. 즉 부활절 40일 전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에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 전에 고기를 실컷 먹고 금식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베니스 카니발은 보통 2월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전 10여 일 동안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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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카니발의 역사적 기록은 12세기 중엽이다. 당시 이퀄레이아 대주교는 자치권이 강한 베니스공화국을 지배하기 위해 반란군과 손잡고 베니스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퀄레이아 대주교가 이끄는 군대가 패전하고 대주교는 매년 베니스에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휴전한다. 베니스 시민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공물로 온 소 1마리, 돼지 12마리를 잡으며 축제를 즐겼다. 그 뒤 1296년 베니스공화국은 사순절 전날을 공식 축제일로 지정했고 이후 더 화려한 축제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고 베니스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가 되면서 축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베니스 축제의 상징인 가면 무도회도 열리기 시작했다. 애초 가면 무도회는 귀족들만의 놀이였다. 귀족들은 궁정과 살롱에서 화려한 가면을 쓰고 익명의 일탈을 즐겼다. 이후 이 가면 무도회가 시민 사회로 퍼져 나가 베니스 카니발의 상징이 된 것이다.

가면은 자아의 탈출이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평소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찾아내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허락된 일탈이자 허락된 향락’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요소다. 베니스 시민들은 가면을 씀으로써 계급, 신분, 빈부, 역할, 성의 구분이 무너지는, 그야말로 욕구의 탈출과 표현을 경험한다. 또 하나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 산물이다. 귀족, 성직자, 군인, 부자들은 시민과 농부, 노예들의 땀과 피로 그 자리와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채찍과 당근만으로 계급과 신분을 유지하는 것보다 1년에 한 번쯤 정체성의 반전, 속박의 탈출을 감행할 수 있는 배설의 장을 마련해 시민들에게 심리적 해방감을 주는 것이 지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카니발 기간 동안 귀족과 성직자들은 시민들의 조롱이나 농담의 대상이 되는 데 기꺼이 임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성적인 일탈은 당연히 있었다. 귀족이든 시민이든 그 누구도 가면을 쓴 순간만큼은 자신의 역할과 신분에서 벗어나 용감하고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분출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카사노바의 ‘활약’이 더 왕성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Daum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13호 (20.01.2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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